레일아트의 2005년도 방향을 국제와 지역이라는 양 축으로 잡고서 국제적으로는 해외교류에, 국내적으로는 지방 문화활동에 더
주력을 하기로 하였다.
그중에 책을 모아 보내기 운동은 공연이 갖는 시공간예술의 한계를 극복해보자는 취지에서 작년 연말부터 시작하였다.
무대에서 기껏 많이 뛰어 보았자 1-3시 시간 내에 끝나는 공연 후 여전히 그 삶터에서 남겨진 이들과 함께 할 여운은 없을 까 고민하다 책을
기증받거나 모아서 전달하는 역할을 자청한 것인데 시행 초부터 중앙여고 도서관이나 개인 기증자들, 그리고 헌책방을 운영하는 사당동 책창고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하여 일단 숫자상에 잡힌 책이 벌써 1000여권이 되었다. 이중 350여권이 1차로 지방에 보내졌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비디오 150점도 정리 차원에서 이때 같이 내려 보냈다. 출발은 좋은 것 같다.
20대에 가난한 고학생으로 생존 자체가 화두이며
졸업을 서른 살에 했으니 무슨 낭만이나 남들 다 해본다는 미팅 한번 가져 볼 여유가 없었던 나는 그래서 동기들에게 따로 노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많이 받았는데, 그러니 더더욱 디스코텍 같은 데는 출입자체도 못해 보았다. 그러다 딱 한번 어찌하여 우연히 디스코텍에 들어갔다가 수많은
젊은이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서울의 청춘들은 다 댄스에만 관심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을 하였다.
80년대 중반 전국 대학생
합창제가 열리는 곳에 락 뮤지컬을 같이 한 인연으로 초대권을 준 성악과 선배는 국립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중 특히 학생들을 보고
“이
많은 사람들이 죄다 성악을 한다거나 거기에 관심이 있어 모인 사람들이란 말이지. 참석 안한 사람들 까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졸업장을 딸 텐데
아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내가 경쟁을 하여야 될지.” 하는 우스개 소릴 한다. 성악도의 입장으로 보면 당연히 우려되는 현실이겠지만 그 객석의
음악도들과 관객을 보면서 경쟁과는 상관없는 삼자의 눈에는 모든 국민들이 음악을 하고 관심을 가진 예술 애호국에 사는 것 같아
괜히 가슴이 뿌듯해졌다. 물론 나는 음악전공이 아니었지만.
어느 강력반 경찰은 맨날 범죄자들과 살다보니 자기 눈에는 범죄자나 범죄를 일으킬 잠재자들까지 작은 골목을 거닐면서도 그 짧은 순간에 다
간파되고 그런 사람들과 도심의 평범한 공간에서도 수없이 마주친다는 말을 설핏 들어보았다.
어느 장소에 있느냐에 따라, 또는 어느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느냐에 따라 뭐만 눈에 들어온다는 식의 시선은 과천선 경마공원역에서 코레일 페스티벌의 한 프로그램으로 일요일 오후에 공연을 하다
경마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을 까 싶어 깜짝 놀란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그 장소를 조금만 벗어나보면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은 바로 확인 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다시 긍정적인 예로 돌아가면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이나 영풍문고,
교보문고에 가면 수없이 진열된 책장 사이 바닥에 덜퍽 앉아서 어쩌면 하루 종일을 책에 탐닉하는 어린 친구들이나, 책을 뒤적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흐뭇하던지. 그들만 보면 온 국민이 다 지식을 좇는 것처럼 보이고, 그런 사람과는 각각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란 뿌듯함에 말이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말하는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접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지식에 대한 갈구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는 링컨이 책을 빌려왔다가 비에 젖어서 대신 일을 하고 그 책을 본인 소유로 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그린
내용도 기억이 난다.
시대와 나라가 다르지만 초등학교 중반때 전기가 들어온 오지 자연동네에서 자라온 나에게도 책은 귀하기만 한 존재였다.
어찌어찌 접한 ‘이야기 한국사’나 ‘계몽사’의 서적들은 어린 동심을 자극하였고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 같은 월간지를 가지고 온 아이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조금만 보자고 사정하는 속에 항상 나도 끼여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독서반에 들어갔지만 아직까지 폐교를 면하고 있는 내
시골국민(초등)학교에는 제대로 된 도서관이 없었던 것 같았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학교사정은 마찬가지였고 다만 새마을 운동의 영향 덕에 동네에서는
몇몇 청년들을 구심점으로 마을문고 같은 것을 만들어 서로 책을 빌려보는 것은 한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다. 버트란트 러셀이나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의 책을 읽으면 무언가 고상하게 보일 것 같아 감당도 안 되는 책을 읽어가며 치기어린 얼치기 허영심에 사로잡힌 때는 2차 성징이 도드라진
지적 사춘기 시대였던 것 같다.
학부시절 학교 앞 헌책방에 들르는 재미로 다니다가 시간이 조금만 생기면 아르바이트 해 번 돈으로
서울역과 청계전의 헌책방들을 뒤지고 다녔다. 서울역은 현재 아예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지금도 청계천에 나갈 때는 미리 가방을 거의 비워놓고
작심하며 돈다. 거기다 최근 집근처 사당동에 헌책방으로서는 제법 큰 규모의 가게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니 하나의 코스가 서울역 대신 대체된
느낌이다.
오늘 조금이라도 이런 공감대가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어 매머드급 서점에 가서 거대한 지식의 탐구 현장을 느껴보라고
하거나, 그런 세련된 대형서점의 갑갑함이 싫다면 가까운 헌책방 순례라도 권하고 싶다. 게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는 대형서점에서와 또 다른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기에.
-박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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