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습니다.
시린 기운은 차츰차츰 우리네 귓가를 스치며 내려옵니다. 조금은 풀린 기온이지만 밤에는 옷깃을 여미는 걸 까먹지 마세요. 겨울잠을 자는 뱀이 아닌 우리는 겨울에도 활동을 해야 합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콜록,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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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위의 꽃뱀
주방장이 식칼 다루듯 의장대원들은 소총을 돌리며 행사에 필요한 동작들을 하고있다. 막사 앞뜰 한 쪽에 여남은 명의 대원들이 빙 둘러있다. 뭘까 궁금하여 다가가 보니 아스팔트 위에 꽃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든 꽃뱀은 난데없이 나타난 대원들에게 에둘린 채 연신 갈라진 혀만 날름거릴 뿐이다.
막상 꽃뱀을 둘러싼 대원들은 미적거릴 뿐 누구하나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꽃뱀은 독이 없을지라도 뱀 자체가 주는 무섬과 혐오의 이미지 때문이리라.
난 한 대원에게서 M-16소총을 건네 받아 개머리판으로 목덜미를 누르고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뱀의 대갈통을 집어들었다. 몸을 약간 꾸무럭거릴 뿐 별 움직임이 없다.
그제야 대원들은 보다 가까이 다가와 신기한 듯 뱀을 구경한다. 페트병에 꽃뱀을 집어넣고 그들에게 넘긴 후 난 작업을 나갔다.
어릴 적 시골에서는 흔히 뱀을 볼 수 있었다.
소 깔 베러 논두렁을 걷다가, 땔감 구하려 오솔길을 걷다가, 우렁이 잡으러 둠벙에 갔다가 뱀을 만나면 작대기로 두둘겨패서 칭칭 감아 의기양양하게 가지고 온다.
또래의 악동들은 잔가지로 툭툭 치며 장난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서슴없이 허물을 벗기기도 한다. 어른들이 보면 술 담근다고 가져가거나 숯불에 구워 술안주 삼아 먹기도 했다.
그 당시엔 개구리를 통째로 꾸역꾸역 삼키는 뱀의 꼬락서니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구리도, 또한 그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도 구경하기가 만만찮다.
헝클어진 반송의 나무꼴을 다듬으며 그 뱀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며 물어보니 다시 숲으로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대원들이 착해서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닐게다. 만약 그렇다면 개구리와 뱀을 스스럼없이 잡아죽이던 어릴 적의 나와 또래들은 다 마음이 악하다는 꼴이 된다.
시골에서 살던 내 어릴 적에는 환경부도 없었고, 환경학과도 없었고, 환경과목이라는 책도 없었다.
병이 생기니 병원이 생기듯 환경과 관련한 단체, 사업, 정책은 이즈막 들어서 초봄의 나뭇잎이 움트듯 우르르 생겨난 것이다.
나와 내 또래의 꼬맹이들은 과연 환경파괴자들 이었을까?
우리들에게는 환경 자체가 환경이었다.
환경이란 말 그대로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배경인데, 우리는 환경의 일부로서 개구리를 잡고 뱀을 잡았다. 그것이 생태계를 흩트리거나 먹이사슬을 끊어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런 어울림일 뿐이었다.
대원들이 뱀을 놓아 준 것은 어떤 위기의 기운을 느낀 탓이리라. 늦게나마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소중하다는, 그것이 비록 혐오스럽고 사나운 파충류나 맹수라 할지라도, 생각은 매우 소중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뱀도 참 불쌍하다.
인간과 뱀은 원죄의 신화 때문인지 인간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지만 지금 우리는 뱀에게도 측은함과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다.
제딴에는 개구리를 영원한 자기네들의 양식이라고 여겼을 텐데, 이제는 오히려 잡아먹히는 꼴이 되었다. 두 눈을 끔벅거리며 덤비는 황소개구리를 보고 슬금슬금 피해야만 하는 뱀의 신세, 알쏭달쏭하지만 인간만이 뱀을 보호할 수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낯익음과 낯설음, 두려움은 낯설음에서 온다.
우람한 대원들은 뱀이 낯설어 두려웠고, 쪼끄만 꼬마들은 뱀이 낯익어 만만했다.
환경꺼리들이 낯익었으면 좋겠다. 개구리와 뱀을 함부로(?) 죽여도 되는 세상, 그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이단일까?
꽃뱀아, 아리송한 세상이지만 꿋꿋하게 살아라.
-종이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