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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한별 그리고 한소리

살음살이/사는 얘기

by 종이인형 꿈틀이 1999. 11. 2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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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가을비가 내린 후엔 추위가 봇물터지듯 누리에 넘실거립니다. 골골거리는 내 꼬락서니가 가엾습니다. 감기 조심 하세요.*********************


한 시.
두엇 학생을 남겨두고 도서관을 나선다.
비온 후 잔뜩 움추린 하늘은 차창에 서리꽃을 피웠구나.
추스린 옷깃 사이를 비집고 스며드는 한기에 목덜미가 시립다.
시동을 걸고 담배 한 개비 필 겨를 엔진을 달군 후, 옴짝 않던 차를 꿈쩍였다.

전조등은 나보다 열 발짝 앞서 달리며 길바닥을 이 잡듯 살피고
후미등은 토끼처럼 빨간 눈깔을 꿈뻑거리며 허둥지둥 따라온다.

스른 달
슬은 별
?봉? 나

별을 헤아릴 수 있다는 건 불행이다.
밤도아 헤도 다 못 헬 별무리를
감나무에 달린 홍시 헤듯
손꼽아 헬 수 있다니!
아, 밤이 너무 길다.


맞은편 아파트 창에 불이 켜있다.
궁금하다.
건밤을 새며 뭘할까?
그네도 나와 같을까!

해삼이 흰 액체를 뿜듯
은빛 쟁반은 빙빙 돌며
찰랑이는 소리를 흘린다.

소금과 대금이 어우러진 서편제의 '소리길'
쥐어짜듯 소리를 내던 송화의 소리가 절절하다.
훗날 동호와 송화가 만나 밤새며 북치고 소리하던 장면이 눈에 선히 아른거린다.
유봉이 그렇게도 지키고자 품었던 건 뭐였나?
스러진 별, 스러진 소리, 스러진 사랑.
밤은 스러져가는 것들을 끄집어 내 앞에 펼쳐놓는다.


### 길 (5:22)

(멀리서 진도아리랑을 주고받으며 송화와 유봉이 걸어온다. 동호도 흥에 겨워 매고있던 북을 친다.)

유봉 : 사람이 살면 몇백 년 사나, 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송화 : 문경세재는 왠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유봉 : 소리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 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

송화 :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속엔 수심도 많다.

(후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유봉 : 가버렸네 정들었던 내 사랑, 기러기떼 따라서 아주 가 버렸네.

송화 : 저기 가는 저 기럭아 말 물어보자 우리네 갈 길이 어드메뇨.

(후렴)

유봉 : 금자동이냐 옥자동이냐 둥둥둥 내 딸, 부지런히 소리 배워 명창이 되거라.

송화 : 아우님 북가락에 흥을 실어 멀고먼 소리길을 따러 갈라요. - - - - - - - -

(후렴) ###


많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도 몇몇 이들은 밤을 지킨다.
정문을 나서는 나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경비대원, 신문배달, 수험생, 철야작업자 그리고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 도서관의 내 책상 앞에는 사진이 한 장 붙어있다. 낙조, 해가 바다에 들기 전의 장면이다. 왜 하필 일조가 아닌 낙조인가!

누구나 시작은 화려하고 힘차지만 끝이 우아한 것은 드물구나. 굿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붙여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보다가 가끔 눈을 들어 고즈넉이 풍경을 보노라면 맘이 그윽해진다.

잘 살고 싶다.
정말 잘 살고 싶다. 삶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그것을 찾고 싶다. 그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어쩜 지금 내가 그리 크게 가치를 두지 않고 있는 일상의 것들인지도 모른다.

유봉이 힘겹게 마른기침을 하며 송화에게 몇마디 말을 한다.
그 말은 송화에게 하는 소리지만, 나도 끄덕거리며 듣는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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