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
93년도 문학계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정읍 출신이며 소위 63년 그룹-공지영,정미진,은희경-인 신경숙님의 <풍금이 있던 자리>로 알고 있다. 지면 발표를 통해 알려진 소설중 가장 탄탄하고 매끄러운 작품으로 선정된 단편이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려지지만 국민학교때 전교에 풍금이 하나밖에 없어 음악시간이면 2층과 별관, 여학생교실까지 악기를 찾아 나르며 낯붉히고 다닌 일이 거의 내 소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무래기들 중 순전히 뒷자리에 있어 키가 다소 크다는, 그래서 힘 좀 쓸 것 같은 애들 중에 나도 속했기 때문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을 부르고 "등대"를 배우던 때의 일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다니던 시골교회에는 그나마 이 풍금도 없었다. 이웃 면소재지 교회에서는 이미 피아노와 전자올갠까지 들어와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때 20대 중,후반인 담임 총각 전도사님은 통기타를 가지고 우리에게 복음송과 찬송을 가르쳐주었다. 그분이 결혼을 하고 새 식구가 된 사모님이 그전 다니던 교회에서 안 쓰던 풍금을 얻어 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당시 고3때로 기억한다.
풍금은 reed organ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데 바람을 내뱉는 식과 빨아들이는 식이 있다. 혹 유치원 같은데서 보았다면 알겠지만 우리 나라는 대부분 바람을 빨아들이는 식이다.
풍금의 유래는 몇 개의 파이프를 조립해 입으로 부는 악기에서 출발했는데 팬파이프나 우리 나라의 생황을 연상하면 될 것 같다.
문헌에는 BC265 크데시비우스가 물 힘으로 공기를 보내어 손으로 관을 열고 닫아 파이프를 울리게 한 것이 최초에 속한다.
근대적으로는 17C경 바로크시대에 페달과 평균을 체택한 것이 진정한 풍금의 효시라 하겠다. 우리 나라에서는 1896년경 선교사에 의해 선보이고 1910년 이전에는 교회, 학교를 통해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김태준씨가 쓴 실학자 (홍대용편전)을 읽어보면 <담헌집>-1762-에 오르간과 관계된 이야기가 나온다. 북경천주교회를 방문해 어거지로 졸라 파이프 오르간을 구경한 홍대용이 신부가 연주하는 것을 눈썰미로 봐둔 뒤 우리음악을 즉석에서 연주하고, 거기다가 악기 원리까지 설명해 참석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언급이다.
"우리 나라에서 허락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이 악기를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당시 조정은 서학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어 그냥 장담으로 그쳤다 한다.
만약 그때 한국식 풍금이 홍대용에 의해 만들어졌면 우리 음악이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 대단한 변혁이 있었을 거라 생각만 할뿐이다.
-93년도에 쓴 일기문 중에서 고등부 학생들을 위해 적었던 칼럼을 발췌했습니다
박우물이 여덟 번째 퍼 오른 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