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돌발상황

박우물(둘째형)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2. 14. 08:59

본문


* 돌발상황

지하철역에서 공연을 하다보면 가끔은 예상치 않은 일들이 생깁니다.
소위 돌발상황이라는 것인데, 사당과 이수역에 비해 관객이 제일 적은 광화문 상설무대에서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는 경우는 조금 특이한 경우입니다.


목요일 오후 6시 30분이면 5호선의 광화문역에서 어김없이 공연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목요일, 그것도 저녁시간을 택한 것은 순전히 제 수업시간 때문이었습니다.
추운날씨에 사람 출입도 별반없는 한 켠에서 처음 몇주는 그야말로 악전고투속에 리사이틀을 해왔습니다.
이런 일이야 관객의 박수로 버티는 법인데, 사람들의 반응이 거의 없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기란 기실 힘이 팽기는 법이지요.
우리가 개척하는 상설무대는 그래도 특설무대가 만들어져 있고 몇십개의 의자까지 준비가 돼있는 곳입니다.
사람 수에 연연하지 않았지만 세 사람 정도 앉아 있는 상태에서 지팡이를 든 어느 중년 여성분이 앉을 자리를 찾더군요.
그 지팡이는 흔히 노인들이 쓰는 용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안내하는 젊은 여성분이 없었더라면 평소엔 그녀의 눈이 되어주는 길라잡이였기 때문이죠.
저는 눈을 보지 못하는 그분이 머무른 것이 고마워 한껏 목소리를 다듬으며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러면서 그 두 사람을 쳐다보니 젊은 여자가 무어라 설명하더군요.
아마 그때 정태춘씨 곡중 "촛불"이나 "사랑하는 이에게"등을 불렀던 것 같습니다.


상황은 그때 발생하였습니다.
이분이 일어서길래 아마 갈 때가 됐겠구나 지레짐작을 하였죠.
그런데 이분이 무대 쪽으로 안내를 받으며 올라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노래는 중단이 되었지요.
첫말은 잘 못 알아들었지만 두 번째 말은 칭찬이 분명했습니다.
"어쩜 그렇게 목소리가 좋으세요."
저는 당황하여 제대로 응대도 못하며 그냥 감사합니다만 연발하였죠.
그런데 그녀의 다음 행동이 나를 더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나 인제 집에 가야 하는데 이것좀 받아요." 하면서 무언가 건네주는 것은 1000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습니다.
몇번 사래질을 하였지만 진심으로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전달되어 그 돈을 받아들었더니 다음에는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
"○○맹인 학교 나오셨어요? 나도 그 학교 나왔는데."
순간 옆에 있는 젊은 여자의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세상에, 시력이 남보다 좋지 않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졸지에 제가 맹인이 되버렸답니다.
그런데 그분의 마지막 말은 제 허를 찌르는 압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구니는 어디 있어요? 이왕이면 바구니를 앞에 놔두고 노래하면 훨씬 수입이 괜찮을 텐데."


그래도 공연은 무사히 마쳤답니다.
집에 돌아오며 괜히 유쾌해 지더군요.
그분이 저에게 친근감을 느낀 것은 비록 잘못된 정보였지만 자기와 같은 사람이라는 동질감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되더군요.
짧은 교감이었지만 누구에겐가 위안이 된 좋은 밤이라 여기며 광화문을 훈훈하게 나섰답니다.

-박우물-


반응형

'박우물(둘째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모의 생일  (0) 2001.01.03
풍금  (0) 2000.12.21
무슨 뜻일까요?  (0) 2000.10.26
나만큼이라도  (0) 2000.09.26
노래속의 고향  (0) 2000.07.2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