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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지 않은 훼방꾼

박우물(둘째형)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4. 4. 1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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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레일아트에도 스토커가 생겼습니다."
무슨 농담인가 싶어 공연팀장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는 삥긋이 웃다가
"우리 공연하는 곳마다 빠짐없이 일정표를 가지고서 찾아다니는 사람이 나타났거든요."
"왜? 그게 어때서. 좋은 현상 아닌가?"
"근데 그게 말이죠.."
반문하는 나에게 옆에 있던 총무까지 가세해 실은 이렇다 하는 식으로 말을 해준다. 그 열성관객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들은 것은 당연히 사무실에서였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시간이 남으면 얼마든지 지하철공연장에 나타나는 것은 흔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단순히 넘길 사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항상 제일 앞에서 신문지를 깔고 집에서 싸온 토스트와 보온병에서 꺼낸 따뜻한 물을 마시며 공연이 시작되면 노래 중간중간 괴성을 질러 댄다고 한다. 그 정도라면 별반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문제는 그가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목소리가 앰프에서 나오는 소리만큼이나 크고, 화음도 완벽하게 틀린 음으로 끝까지 따라 부른다는 것에 있었다. 얼마동안의 현상이니 무시하라 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미치겠어요. 어제는 제발 노래를 따라 하지 말라 했더니 알았다더며 채 5분도 못되어 앞자리에서 침을 계속 찍찍 뱉어가며 방해가 되어서 끌어냈죠. 다시 그러면 혼을 낼 거라고 해도 막무가내여요. 화장실을 가길 래 앞에서 나오기만 해봐라 하고 기다렸더니 겁이 났는지 아예 안에서 나오지 않아 그냥 올라왔죠. 도대체 그 많은 노래를 어찌 다 외우는지 우리보다 더 곡을 꿰차는 것 같아요. 잠시도 쉬지 않고 목청껏 불러대 소리를 다 잡아 공연 맥을 끊고, 또 잠깐 이야기를 할 때 느낀 거지만 얼마동안 이를 안 닦았는지 구취가 너무 심해 옆의 사람들이 그냥 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관객들까지 쫓아내고 있어요."
하도 자주 주변사람들을 통해 하루 걸려 그에 대한 소리를 듣다 보니 이제는 나도 그 사람 자체가 궁금해졌다.

"저 사람인가?"
퇴근을 하다 이수역에서 노래여행이 공연할 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한 관객을 가리키며 물어보니 옆의 사람이 맞다고 응대를 한다. 낡은 가죽잠바를 입고 있는 그는 익히 들어온 정보대로 그때도 맨 앞줄에서 신문지를 깔아놓고서 보온병과 컵까지 들고 있다. 벌써 토스트는 다 먹었는지 열심히 흥겨운 노래가 나오면 '끼르르르' 하는 소리를 연달아 지르고 있는게 목격이 되었다. 다만 처음과 달리 공연진들이 이제는 무시를 하거나 신경을 다소 꺼버린 게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 스탭의 적극적인 제지도 없었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은 얼마되지 않아 이어졌다.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종합공연이 이루어지는 사당역, 의자정리가 끝나고 의례 그러하듯 내가 먼저 노래를 하고 다음 공연자를 소개하는데 몇몇이 나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며 앞을 가리킨다. 그가 보였다. 우리 스탭진들은 드디어 그가 나타났다고 키득댄다. 공연중에 보아하니 시선이 닿을 때마다 거의 가리지 않고 침을 뱉는데다 노래를 큰소리로 따라해서 몇 번 제지를 하였지만 채 1곡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목청을 높인다.
"최모모씨, 저 노래할 때는 괜찮지만 님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공연이 방해되니 다른 분들이 공연을 할 때는 조용히 관람만 하셨으면 합니다."
공연팀장이 공개적으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하자 객석에 앉아 있던 그는 '어, 어떻게 내이름을 알았지?' 하며 되려 즐거워한다. 물론 몇분 동안은 얌전히 앉아있다.

사당역에 도착하는 그의 시간은 항상 일정하였는데 이수역이나 서울대공원에서 공연을 마치고 온 팀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이미 다른 공연지를 다 섭렵하고 최종 귀결지인 사당역으로 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는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이런 그의 성실한 공연장 출석은 겨울 평일동안도 이어져 우리 멤버들끼리 오늘 영등포구청역에 그 사람 나타났다는 전화문자를 보내면 낙성대역의 스탭진이 여기에 이미 와있는데 라고 하며 혀를 끌끌 차는 날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제가 잘 못 알려준 것 같아요."
그날따라 모처럼 존 덴버의 흘러간 팝송을 부르다가 한번, 또 혼성포크듀엣으로 배미자님과 노래를 부르다 객석에서 줄기차게 틀린 음정으로 따라하는 그의 도발적인 목소리 때문에 두 번째 노래가 중단 되어 화가 치밀어 있는 나에게 서울대공원역에서 포크공연을 하는 심재준군이 다가와 쭈삣쭈삣하며 말을 흐린다.
"무슨 소린데?"
"저번에 서울대공원역에서 노래가 끝나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또 언제 공연해요 하고 물어오길 래 매주 토요일 오후에 사당역은 여러 가지 종합공연을 한다고 알려주었더니 그다음부터 계속 보이네요. 제가 안 알려주었으면 이런 일이 없는데..."
그렇게 일정을 꿰고 다니는 열성관객이니 결국 사당역에 출근하는 것은 시간의 차이이지 누가 알려주고 아니고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나 재준군이 자책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우리들은 주범이 예 있다며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웃음을 동시에 터트렸다.
나중 목요일마다 왕십리 공연을 하는 공소야님에게도 이미 몇 번 다녀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물론 지하철가수의 대명사처럼 활동하는 엄진서씨에게도.

이사람 저사람에게 취합하여 듣거나 그 스스로 발설한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그는 원래 이발사였다고 한다. 물론 결혼까지 한 사람이다. 애들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IMF 여파로 그저 무난하던 이발소에 하루 손님이 2-3명 수준까지 급감을 하면서 무력감에 빠지고 심지여 성기능 장애까지 왔다고 한다.( 이부분은 동대문운동장에서 공연 후 옆의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듣게 된 정보인데 그가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을 하여 듣고 있던 공연자가 되려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다)나중에는 아내가 집을 나갔던가, 아니면 이혼을 하자고 하였던가 그래서 결국은 혼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존재의 의미를 따지자면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열리는 레일아트 공연을 저녁까지 싸가지고 다니면서 내내 따라 다니는 것이 아마도 유일한 낙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그의 지금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매일 따라다니면서도 가수가 누군지 몰라 다시 이름을 물어보고 자기를 구박한 사람들을 전혀 구분 못 하는 등 편리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무실이나 각 도시철도나 지하철공사에 전화를 걸어 일정을 일일히 확인하며 한마디 하면서 이렇게 전화를 끊는다고 한다. '오늘은 왜 공연이 많지 않네요.'

"드디어 그 사람이 일산에도 나타났습니다."
레일아트가 공공장소인 철도와 지하철, 공항등지를 벗어나 일산 라페스타 문화의 거리에서 공연을 작년 여름 후반부터 해왔는데 워낙 먼곳이라 설마 그곳까지 그가 나타날까 하는 소리들이 사무실에서 있어왔다. 누구는 워낙 열성팬이니 그곳에도 올 거라는 예측을 하였지만 막상 라페스타 거리까지 출연하자 말을 전하는 이는 무엇이 그리 신난 지 희희덕거리며 전달한다. 그의 출현을 완연히 반기는 투다. 길들여 진다는 것은 참으로 우습게 여겨진다. 오히려 그가 안 나타나면 게시판에서도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로 우리 공연장에서 그는 또 하나의 자연스런 풍경이 되어있고 우리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 가 싶다.

어김없이 나타나 공연장의 맥을 끊기도 하지만 어쩔 땐 또 가장 분위기를 돋우는 촉매역할을 하는 이가 그라는 소리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수도 치지 않고 밋밋하게 쳐다보는 시민들에 비해 그는 열성적으로 박수를 쳐가고 중간중간 효과음까지 적절히 삽입해 추임새를 넣다보면 공연장 자체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어서다. 여전히 지금도 그는 침을 예사로이 뱉어대고, 정적인 곡에서도 박수를 치거나 자기가 모르는 곡이 나오면 '아는 곡 좀 하세요' 하며 적극적으로 주문까지 한다. 우리 공연자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그의 존재에 대해서 이제 거지반 알아가는 것 같다.



추가: 편짓글 말미에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집어 넣고자 할 때 추신을 활용한다는 소리가 있다. 이 글을 써가는 중에 가수들 모임을 가졌는데 그에 대한 정보가 하나 더 늘어났다. 물론 전해들은 이야기다.
"저 오늘은 일찍 가야되요."
그가 반가운 듯 공연을 준비하는 가수에게 다가와 부러 말을 건다.
"이혼한 마누라가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서 울더래요. 나랑 다시 살면 안되겠냐고. 근데 우리 아버지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돌려보냈어요. 그래도 나 오늘은 3곡만 듣고 갈거예요."
확연히 구분은 안가지만 그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매일 찾아가는 곳이 정형화된 의료 시설이 아니지만 레일아트 공연지를 찾아다니다 박수를 치고 맘껏 노래를 따라 부르다 점진적으로 예전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일에 우리는 기꺼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고 기타를 튕길 수 있으리라.
퇴근길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맞추어 제일 앞좌석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위에 열거한 특징을 지닌 사람이 노래를 부르다가 '저 사람 노래 잘하죠, 근데 저 가수 이름 누구예요?' 라고 질문을 하면 피하지 말고 한 두번은 아는대로 응대를 해주고 그가 치는 박수의 절반만 따라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궁금하다. 그가 언제까지 우리 공연지를 따라 다니면서 밉지 않은 훼방꾼으로 남게 될련지. 그보다 지극히 평범한 자연인으로 자신의 생계를 챙겨가며 공연현장에 안보이게 될 시원섭섭한 날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 그리고 가끔 말하게 되리라. '그 아저씨 가게는 잘 돼가고 있을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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