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아이의 눈동자엔 내가 없다 1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 25. 07:30

본문

안녕하시죠?
'시골뜨기의 잠꼬대' 살림꾼 박종인입니다.
<아이의 눈동자엔 내가 없다>라는 글을 시작합니다. 언제 마무리 될지는 나도 모릅니다.
틈틈이 쓸 것이고, 사이사이에 다른 글들도 끼어넣을 겁니다.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더라도 이해 해 주세요.
-종이인형-


1. 아이의 눈동자엔 내가 없고, 내 눈동자엔 아이가 있다.

-용희야!

엄마의 손에 잡혀 쭈뼛쭈뼛 들어서는 아이를 반가이 부르자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언뜻 보면 두리번거리다가 잠깐 내 눈과 마주친 것처럼 보이지만 용희는 분명히 날 쳐다봤다.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지만 난 바짝 달라붙은 끈끈이처럼 아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아이의 눈 속엔 내가 없고, 내 눈 속엔 아이가 있다.

뭇 사람이 붐비는 복지관 현관에서 두리번거리던 아이는 커피자판기에 눈길을 꽂았다. 난장판처럼 북적대지만 용희에게는 커피자판기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치닫는 아이와 동시에, 나도 잽싸게 아이에게도 다가가서 두 팔을 벌리고 아이 뒤에 섰다. 보이기에는 다른 사람을 아이에게 못 오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못 가게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용희는 자판기의 지폐투입구에 천원 짜리를 집어넣고는 반환레버를 당긴다. 자판기는 지르릉, 소리를 내며 천원을 토해낸다. 아이는 다시 천원을 집어넣는다.
대여섯 먹은 아이라면 서너 번하고 싫증 낼 그 행동을 열한살배기 용희는 말릴 때까지, 아니 말려도 막무가내로 자판기에 매달린다.

-용희야. 이제 그만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껴안듯이 용희의 두 손목을 가볍게 쥐며, 그러나 언제든지 꽉 쥘 준비를 하며 자판기로부터 떼 놓으려 했다. 아이가 내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내 손엔 힘이 들어갔다.
주변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조심조심 신경 쓰며, 발버둥치며 소리지르는 아이를 겨우 구석의 의자로 데리고 갔다.
이곳에서는 통제하기가 쉽다. 권투선수가 사각 링의 구석으로 상대를 몰아넣고 공격하듯 난 손을 벌리며 떡 버텨 섰다.

얼굴이 벌개진 채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소리를 지르는 용희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발을 동동 구른다.
난 무관심한 듯, 그냥 물끄러미 아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아이가 제풀에 꺾이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괜히 달랜다며 어루만지거나 안아주다가는 할퀴거나 물릴 수 있다. 달포 전에 발버둥치는 아이를 달래느라 안았다가 어깻죽지 물렸는데 아직도 흔적이 가시지 않았다.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가듯 수그러진 아이는 벙실벙실 웃으며 날 본다. 얼마나 해맑은지 모른다. 방금 냇가에서 나온 선머슴처럼 깨끔했다.

-용희야, 들어가서 예배 드려야지.

무릎을 구부리고 아이를 가볍게 안아줬다. 아이도 팔을 내 목에 두른다. 가볍게 토닥거리고 일어섰다. 손을 잡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연신 방긋거리며 고분고분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아이를 반기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예배실은 도떼기시장처럼 술렁거렸다.
마구 소리를 지르며 손을 내두르는 아이, 손뼉을 치며 제자리 뛰기를 하는 아이,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제 손등을 무는 아이, 바닥에 누워 뒹구는 아이 등등.
이런 어수선한 가운데 선생의 인도를 받은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난 아이의 두 손을 포개 모으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 우리 용희가 오늘도 예배를 드릴려고 교회에 왔어요. 예배 잘 드리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어요. 아멘!

손은 내 손에 감싸 안겨 옴짝달싹 못하지만 고개는 연신 두리번거렸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유일한 소리는 아멘 뿐인데, 하지 않는다.

-용희야, 아멘 해야지. 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어요. 아멘!

잠시 미적거리더니 꼬막이 아가리를 벌듯 입을 열었다.

-아메에!

고개를 획 돌려 날 빤히 쳐다보더니 갸우뚱하며 히죽거린다.
눈시울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고 눈동자는 유리구슬처럼 번들거린다.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참 맑은 눈이다.
-계속-


==================================================
* 그렁그렁 : 액체가 가장자리까지 괴어 거의 찰 듯한 모양.
* 난장판 : 여러 사람이 마구 떠들어 뒤죽박죽이 된 판.
* 눈시울 : 눈언저리의 속눈썹이 난 곳.
* 도떼기시장 : 도거리로 파는 시장. 도매시장. 매우 북적거리는 곳.
* 물끄러미 : 우두커니 한 곳만 바라보는 모양.
* 뭇 : 수효가 많음을 나타내는 말.
* 바짝 : 아주 차지게 달라붙거나 세차게 죄거나 우기는 모양.
* -배기 : '나이가 들어 있음', 또 '그러한 아이'의 뜻. [나이배기/ 세살배기 옷]
* 수그러지다 : 사납던 기세가 누그러지다.
* 아가리 : 입의 속어. 그릇 등속의, 물건을 넣고 내고 하는 데.
* 언뜻 : 잠깐 나타나는 모양. 별안간


반응형

'글쓰기 >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 즈음에 1  (0) 2000.02.01
아이의 눈동자엔 내가 없다 2  (0) 2000.01.29
신문보급소에서 2  (0) 2000.01.20
세 잎 클로버의 띠앗머리  (0) 1999.12.17
소록도에서  (0) 1999.12.1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