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마 *
가을에 대해서 느끼는 사람마다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이 있겠지만,
이곳 농촌에서는 무엇보다도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라 말할 수 있다.
고개 들어 쳐다봐야 하는 공중에 매달린 과실을 비롯하여
허리를 굽히면 얼굴을 간지럽게 할만한 키 작은 알곡들은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며 황금빛으로 거둘 때를 알려준다.
이에 질세라 땅속에서 자라는 열매들은 잎의 변화를 통해
잉태한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듯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그 중에서 고구마는 땅 속에 숨어있는 열매 중에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
흙에 심겨지고 한번도 태양을 못 본 채로 자란 고구마를 캐면서,
마치 보물을 캐는 기분과 자연의 오묘한 신비를 맛본다.
처음 심을 때는 뿌리도 아닌 한 줄기를 대충 자르고 흙으로 덮어주었는데
어느새 이처럼 당당히 자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통통한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줄기에 형제처럼 몇 개씩 붙어서 엄마 품에 안기듯 황토두둑에 심겨진 고구마를 캐는 즐거움은,
체험하지 않고는 누릴 수 없는, 심고 거두는 농부가 누리는 행복이라 할 수 있다.
가끔 보통보다 큰놈이 나오면 구광감이라고 하며 탄성을 지른다.
여기 말로 고구마를 싹을 낼만한 씨 종자를 말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겨울나기에 고구마는 하루 세 때의 한 끼를 담당하는 식량이었다.
집집마다 윗목에 짚으로 만든 가마니둥지에 고구마를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아놓고
날것으로도 먹고, 삶거나 구워먹기도 하며 점심을 대신하기도 하고,
어느 때나 부담 없이 꺼내먹는 가장 흔한 간식거리였다.
그러다 풍요로운 식량자급이 되자 농가마다 심었던 고구마는 소리 없이 사라지더니
요 근래에는 인기식품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궁핍했던 시절에 허기(虛飢)를 면케 해주던 가난의 상징인 고구마가
이제는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을 예방하는 건강식품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참으로 시대에 따라 가치(價値)의 명암(明暗)이 뒤바뀌는 급격한 세상의 변화를 느낀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올 해 처음으로 한 마지기 가량 고구마를 심었다.
봄에 심고 이 가을에 거두면서 우리의 인생의 한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씨고구마에서 함께 자라난 줄기를 밭에 심을 때 이곳 사람들은 '시집' 간다는 표현을 한다.
아주 적절한 말이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성인이 되면 새로운 터전으로 헤어짐과 아울러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인생과 같다.
특히 고구마는 자신의 줄기를 자르는 아픔을 당하지만
주어진 환경을 탓하기 전에 살기 위해 악착같이 영양분을 받기 위해 몸부리치며
스스로 뿌리를 만들어 가는 그 결과로 고구마가 생기는 것이다.
요즘 경제적인 어려움과 생활고에 선악을 분별 못하는 자녀들과 함께
동반자살로 고귀한 생명을 내버리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과 어른들의 어리석음에 한탄을 금할 수 없다.
지금도 같은 하늘아래 헤어진 이산가족이 만나는 사연을 들어보면,
너무도 궁핍한 시절에 목구멍이라도 살기 위해 부득이 헤어지는 가족들의 고통을 엿보게 된다.
당시에는 그럴 수박에 없었지만 세상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란 법은 없다.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나아지고 다시 일어설 기회는 항상 열려있기에
헤어진 가족과 만나는 감격의 날이 오는 것이다.
멀리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한 분밖에 없는 외삼촌의 인생이 그러했다.
비교적 탄탄하던 시골 살림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외숙모님도 지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났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오년 전쯤 일이다.
외삼촌은 외할아버지와 두 아들과 딸 넷을 책임지는 참으로 괴로운 환경에서,
이제 막 젓을 뗀 어린 막내아들만 남기고 큰아들은 머슴으로 보내고,
딸들은 둘 씩 짝지어 친척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으랴.....
자녀들과 뿔뿔이 헤어진 외삼촌은 그 후 입양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자녀로 남기고 그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에 와서는 다들 장성하여 가정을 이룬 대 가족이 되었고
자녀들에게 공경 받으며 올해로 칠순 잔치를 하게 되었다.
올 여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 외삼촌의 그 험난한 과거를 처음 듣게 되었고,
고구마를 캐면서 그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이제 맛있는 이 호박고구마 한 상자를 보내드리며
외삼촌의 용기와 강인한 삶의 의지에 박수를 보내며 끝이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기원하고 싶다.
한 인생의 삶의 열매가 되든, 모든 식물의 알곡이 되든,
열매가 있기까지의 과정과 사연과 인내와 흘린 땀방울의 의미는 참으로 소중하다.
이 가을에 눈을 들어 모든 것을 둘러보면 보이는 열매마다 알알이 들어있을
보이지 않은 고난의 흔적을 생각하니 감사와 절로 숙연(肅然)해지는 마음이다.
자신을 품안에 키워준 흙을 닮아서 흙처럼 붉은 고구마는,
또 자신과 같은 색을 닮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며 그 사명(使命)을 다하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활뫼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