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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에 피는 꽃들

활뫼지기(큰형)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2. 7. 1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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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에 피는 꽃들 *

교회 정원(庭園)에 해마다 피는 갖은 꽃들을 보며 흐르는 시간을 느낀다.
큰길가의 자투리땅에 가꾼 페튜니아와 팬지처럼 봄부터 가을까지 내리 피어있는 꽃들도 아름답지만
철따라 피고지는 우리꽃들이 우리의 정서를 더 자아내는 것 같다.

봄에 피었던 꽃들이 지면 뒤이어 피어나는 꽃들이 있어서 정원은 언제나 꽃동산이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내년에 다시 만나지만, 내심 뿌듯한 것은 다시 만날 때는 더욱 많은 꽃들이 무더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수선화나 백합 같은 알뿌리는 보이지 않은 땅속에서 고이 자라다가
슬며시 흙을 제치고 새끼들과 함께 얼굴을 내밀며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연의 법칙이 어김없이 드러내는 그들이 있기에 우리네 삶의 활력을 얻는다.

정원에 피는 꽃들 중에 나팔모양의 백합 정원 가득히 향기를 흩뿌리며 동서남북으로 십자꼴의 꽃을 피운다.
하얀 나팔모양에 밤색 한 줄을 뿌린 그 꽃의 향기는 너무도 달콤하다.
비슷한 향기를 은은히 풍기는 치자꽃도 그 향기만큼이나 사람의 눈길을 끈다.
막 피어난 치자 꽃의 티 없는 순백은 세상에서 가장 하얗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어떤 것도 견줄 수 없는 백색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백합꽃은 일주일 가량 피어있지만 치자꽃은 두어 시간만 지나면 노랗게 시들어 간다.
그래도 가지마다 새로운 꽃망울이 맺히기에 오래도록 그 꽃과 향기를 즐길 수 있다.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미도 다양한 색깔의 품종에 따라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향기에 있어서는 백합과 치자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 꽃들은 일정한 기간까지 밤낮으로 피어있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빛에 따라 달리 피는 꽃들도 있다.
텃밭 둔덕에 심겨진 달맞이꽃은 빛에 아주 민감하다.
이름 그대로 저녁에만 피어나는 달맞이꽃의 신기함은 탄성을 지르게 한다.
두 해 전에 우리 집에 온 손님에게 꽃들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달맞이꽃에만 있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어스름이 내리는 그때 달맞이꽃에 다가서자 달팽이가 촉수를 내밀며 슬몃슬몃 움직이듯 꽃잎이 스르르 피어나는 것이다.
TV에서나 보았던 꽃피는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활짝 피기까지는 불과 오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쪽저쪽 줄기에서 연달아 피어나는 광경은 경탄 그 자체였다.
분주하게 오고가는 길가에서 조용한 저녁에는 외롭지만 고고(孤苦)하게 피어 있는 달맞이꽃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낮에 볼 때는 시들어진 모습만 보여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지만,
시골길에서 화려하진 않고 수수한 황금색의 달맞이꽃이 나를 황홀하게 한다.
가끔씩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와 차를 차고에 두고 나오면 제일 먼저 반겨준다.

자주달개비꽃도 마찬가지다. 이 꽃은 아침과 오전에만 피다지는 꽃이다.
작은 자주색의 꽃잎 사이로 노란 보석을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꽃은 오랫동안 피는 꽃이다.
이들의 같은 점은 꽃이 한 철 내내 피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꽃은 하룻밤이나 한나절 정도 피다 진다는 것이다.
단지 여러 꽃대가 있어 꽃이 지면 다른 줄기에서 꽃을 피우기에 늘 꽃이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달맞이꽃도 꽃을 피면서 위로 자란다.
하루 저녁에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이들은 일년을 기다린 것이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일종의 경외감마저 든다.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도 그 꽃들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인고(忍苦)의 시간을 견디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모습과 향기를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생활도구들이 갈수록 편리해지는데 실제의 삶은 더 바빠지는 것이 현대의 모습이다.
일년에 단 하룻밤을 피다지는 이 꽃들을 외면한다면 이것이 창조주의 마음을 서운케 하는 게 아닐까?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 송이의 꽃은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가까이서 자세히 봐야만 느낄 수 있는 생명의 노래, 자연의 신기함, 삶의 지혜, 아름다움의 실체 등등.
금방 스러질 한송이 꽃을 위해 일년을 기다릴만한 가치가 과연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속에는 일년동안 배워도 깨달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숨어있다.
오직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자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리라.

오늘도 정원 중앙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비를 맞으며 위성안테나 모양의 무궁화가 무궁하게 피어난다.

-활뫼지기 박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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