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봄날 오후

살음살이/사는 얘기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2. 4. 22. 08:33

본문


* 봄날 오후 *

당직이다.
부산스런 직장이 오늘은 멍하다.
이러구러 오전이 지나고 자장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갈음하니 이어지는 오후 한나절.
당직실에서 뒤척거리며 바보상자를 들여다보다가 사무실로 올라왔다.
창가에 나란히 서있는 난초들이 말없이 반긴다.
난 그네들에게 물 한번도 주지 못했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코 지나쳤는데 오늘은 그들이 눈에 들어온다.
벌 한 마리가 잉잉거린다.
그의 자리는 여기가 아닌데 왜 들어왔을까?
자리를 잘못 잡은 자의 모습은 역시 초라해.

창밖을 내다본다.
굳이 찡그리지 않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저만치 한달음의 산,
그 산이 옷을 스르르 갈아입어도 난 눈치를 채지 못했다.
눈길이 스칠 때 눈 눈동자에 잠깐 머물던 노란빛의 개나리가 어느새 연두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짙은 녹색의 잣나무 옆에서 엉거주춤하던 신갈나무도 덩달아 말간 아이처럼 풋풋한 옷차림을 하고 서 있다.

그지없이 높은 하늘, 거기에 빛이 있다.
그늘진 안은 시원하고 볕이 비치는 밖은 덥다.
온도는 철을 오락가락 제멋대로다.
하긴, 사람도 제멋대로이다.

휴일 오후의 사무실, 평일과는 완전 딴판이다.
전화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있다.
멍하니 말이다.
이따금은 필요한 망상.

백지에 끼적거리다 지운 글씨들.
짝을 맞추지 못한 '조각그림맞추기' 처럼 불안전한 글은 그대로 미완성이다.
그 엉성하기 짝이 없는 글씨들을 다시 본다.

----
나무는 몸 안에 나이테를 그리며 자란다.
조개는 몸 안에 나이금을 그리며 자란다.
시가 시로, 날이 날로 이어지는 새
나에게도 나름의 때깔이 배어간다.
-----

다시 창밖에 눈길을 던진다.
창 너머 숲에 한 나비가 있다.
내가 그 나비이다.
가볍게 나풀거리는 나비를 보며 눈을 감는다.

-종이인형-
 
반응형

'살음살이 > 사는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 좋은 개살구  (0) 2002.12.23
쉼표  (0) 2002.12.14
삼한사온  (0) 2002.01.23
새벽에  (0) 2001.06.27
사직서  (0) 2001.05.2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