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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피리 부는 사나이

박우물(둘째형)

by 종이인형 꿈틀이 2012. 12. 2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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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노래여, 너는 어디로 흘러가느냐.

노래하는 자는 어찌하여 너를 품었느냐.

노래하는 자여, 누구를 위하여 노래하는가.

음률은 떠돌아 어디로 가는가.

누구의 가슴에 스미어 살아가는가.

누구의 가슴에 심어져 그리움으로 피어날까.

 

 십일월의 첫날 저녁, 종일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이 불었다. 첫추위라서 더 매서웠다. 사람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종종걸음을 치면서 바삐 제 갈 길을 가고들 있는데 전철 안 역사에 한 사람이 있었다. 춥고 을씨년스러운 너른 공간 한 켠에 앉은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기 전 노랫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와 마음이 기울었던 건 그 음색 때문이었을까. 잡아끄는, 파고드는, 구슬프고 애잔하지만 때로 힘차게 울리는. 잊지 못하고 가슴 저 깊은 곳에 남아있던 아주 오래 전 노랫가락이 붙잡았던 까닭일까.

 얇은 점퍼를 입고 안경을 쓴 남자는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감은 눈 때문이었는지 그의 눈이 나쁜 것은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에 마련된 원형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찬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선 채로 팔짱을 껴 보아도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두어 곡의 노래가 끝난 후 집으로 향하고픈 마음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그의 노래를 들었다.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발장단을 맞추며 가락에 빠져들다 보니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래를 떨치고 바삐 가야할 곳이 있었던가. 누군가가 기다리더라도 저 가락은 지금 한 번 뿐일 텐데. 멈추어야 할 때 멈추지 못했던,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 순간들이 떠올랐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개찰구를 빠져나온 이들의 발걸음은 따뜻한 곳을 찾아 가느라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추위를 모르는지, 아랑곳하지 않는지 알 길이 없이 노래를 고르고 하모니카와 휘슬을 불고 기타를 치면서 세월의 고갯마루를 넘어서는 이들에게 아스라이 잊혔을 법한 음률을 고르고 들려주었다. 맨 처음 고백, 아도로, 시인의 마을, 팔로마 블랑카, 원 썸머 나이트, 더욱 더 사랑해...

 중년의 남자 한 둘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섰다. 더러는 무심히, 더러는 눈길 한 번 주고는 제 길을 가는 중에 차디차게 식었을 그의 손에 따뜻한 음료를 건네고 총총히 멀어져 간 이가 있었다.

 수십 개의 계단을 다 올라선 많은 이들이 저 노랫가락을 단 한 소절이라도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해 내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될까. 일상의 무료하거나 분주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문득문득 노래와 함께했던 어느 한 시절을 불러낼 수 있을까. 첫사랑, 첫 마음 같은 그리운 사연들이 노랫가락에 실려 돌아오기도 하려나.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네, 그것은 그리움입니다.”

 “그림이 그리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리움이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얼굴 그림이 되고, 그리운 산이 있으면 산 그림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산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소설 ‘바람의 화원’에 보면 신윤복은 스승인 김홍도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움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고 K선생은 입버릇처럼 말하신다. 고여 있지 않은 것, 흘러가는 것들은 가만 보면 그 이름에 ‘ㄹ’을 품고 있다고 하셨다. ‘ㄹ’은 어디든 뻗어가는 모양새다. ‘그림’과 ‘그리움’이 ‘ㄹ’을 품고 있듯이 ‘노래’도 그렇지 않은가. 그리움은 결국 붙들어 앉힐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가슴에 남거나 자유로이 흘러가는 노래도 결국 그리움 아닌가. 그리운 사람, 그리운 산천, 그리운 마음들이 있어 그걸 어떻게든 잠시 내 곁에, 내 안에 머물게 하려고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닐까. 네게 닿는 끈 하나 부여잡으려는 간절한 몸짓이고 소리이자 부름이 노래이고 글이고 그림인 것일 게다.

 

 지하철 밖의 표정이 사계절 요동을 쳐도 늘 무채색인 지하공간에 ‘Rail Art'라는 색을 입히고 십 여 년이 넘도록 그리움을 퍼 나르는 그의 이름은 박우물이다. 바가지로 어느 누구든지 우물가에서 물을 퍼가라는 뜻일까. 우리에게 우물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 듯하나 그처럼 어딘가에 남아있을 우물은 깊고 깊어서 누구에게나 그 물을 허락할 것이다.

 국내 1호 지하철 상설공연자 겸 기획자인 그가 어디에서 언제 왔는지, 어느 때쯤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역사 안에 부려놓은 노랫가락 한 소절, 지친 몸을 부리려 집으로 가는 사람들의 귓전에 남아 울린다면 그는 어제도 내일도 휘슬과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를 치는 손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노래는 불후를 꿈꾸지 않는다. 다만 흘러갈 뿐이다. 불후를 꿈꾸지 않는 노래가 남는 것은 거리에서, 지하도에서 'rail'처럼 흐르고 싶은 마음을 안고 그 같은 이들이 애지중지 품고 가기 때문일 테다. 어쩌면 누군가 귀 기울여 들어주지도 않을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무도 들어주지 않더라도 지나가던 바람이 듣겠지. 수백 수천의 사람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가던 걸음을 멈춘다면 노래는 스스로 길을 찾아 가겠지.

 피리를 불어도 더는 춤추지 않는 세상에서 그의 하모니카와 휘슬이 오래 녹슬지 않기를, 노래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기를. 자신의 달란트를 통해 팍팍한 시대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이들의 심성을 조금이라도 어루만질 배경이 되고자 한다는 그의 영혼이 끝내 자유하기를, 지친 어깨를 향해 음률을 고르고 기타를 매만지는 손끝이 추위에 갈라져도 기타를 내려놓지 않기를. 흘러가는 바람결에도 그러기를.

 

                                                                                          

출처 : 라틴애(Latin愛 Latin에)
글쓴이 : 도라지꽃 원글보기
메모 : 작은형인 박우물에 대한 글입니다. 지하철에 울리는 형의 노래가 누군가의 가슴에 씨앗이 되어 위로와 희망의 열매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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