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해서 업무를 막 시작하려는데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버지 방금 돌아가셨다>
오늘 아침 8시 43분에 옥한흠 목사님이 소천하셨다.
지지난달에 목사님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셨다.
미국에 있던 친구는, 어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가족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목사님은 지난달 중순에 상태가 더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기신 후 인공호흡으로 생명을 연장하시고 계셨다.
미국에 있던 첫째 성호형과 세째 성수도 한국으로 들어와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었고,
사랑의교회 온 성도들도 목사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목사님이 중환자실로 옮긴 후 촉각을 세우고 있었는데, 막상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접하니 한동안 멍했다.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뵙고 왔다. 영정사진 안의 목사님은 참 평온해 보였다.
옥한흠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예전에 친구네 집에 가서 10번 넘게 잤었지만 목사님을 뵙지는 못했다.
목사님은 평생동안 평신도를 깨우는데 혼신을 다하셨고, 자녀들도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적었다.
언제가 친구네 집에 갔을 때 친구의 어머님이 친구의 아버지인 옥한흠 목사님에 대해 말씀하셨었다.
근데 목사님에 대해 좋게 말씀하시기보다는 잠깐이지만 오희려 불평을 말씀하셨다.
어느 집에서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불평하는 모양이었다.
지나가며 하신 말씀이었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의외로운 일이었다.
그렇다. 목사님은 가정적이지 못했다. 아니 가정적일 수 없었다.
교회와 결혼한 것처럼 종일 교회에서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몰두하셨다.
아내인 어머니에게, 아들인 친구에게 불평을 사더라도 성도를 위해 미친듯이 매달리셨다.
가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빈 자리를 어머니께서 채우시며 세 아들을 잘 양육하셨다.
언젠가 목사님이 설교 중에 친구에 대한 얘기를 하셨다.
세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자기에게 불만을 얘기할 때 아버지로서 안타까웠다고.
어린 친구는 목사님이 남(?)에게는 잘하고 자기에게는 못하는 아버지가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목사님은 아버지로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유명한 아버지를 둔 덕(?)에 아들은 자유롭지 못한(?) 불편을 감수하기도 했다.
성도를 향한 사랑과 열정으로 교회를 세우신 옥한흠 목사님,
그리고 목사님이 교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가족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목사님은 은퇴를 하신 후에도 아들들과 함께 한 시간은 별로 없었다.
이미 커버린 아들들은 각자 자기들의 길을 찾아 멀리 떠나고 없었다.
목사님이 중환자실로 옮기셔서 의식도 없이 인공호흡기로 보름 가량을 투병하시는 동안,
아들들은 아버지 곁을 전통의 화살처럼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아들들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목사님은 의학의 상식을 깨뜨리며 버티셨다.
보내드리는 입장에서 떠나시는 분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큰 위안이자 행운이다.
갑작스런 이별은 빼앗김이지만 준비된 이별은 내려놓음이다.
힘든 고통을 이기시며 버티신 목사님은 이제 육체와 함께 세상의 사명을 내려놓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목사님, 그리고 아버님! 잘 가세요. 이젠 추억입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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