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간곡한 사연을 전달하려고 썼던 글을 5월 스승의 날에 맞추어 다시 적어봅니다.
제게 부모님은 유전형질을 물러주고 키워주셨지만 제 일생의 방향을 설정 해준 분은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인 이분이라 감히 말하고 싶은데 혹여 만나 뵐 날이 올련지...
<깨어진 선생님에 대한 환상>
제게 있어 학교에 대한, 아니 정확히 선생님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사실 초등학교를 입학한 72년 첫해부터 깨졌다고 봅니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평생을 교단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인데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대한민국 행정단위 제일 하부구조가 면, 리인데 그 리 단위도 아닌 자연마을에서 자라난 저는 모두가 가난했던 시기지만 유달리 더 추레한 모습이었다 봅니다.
그러니 선생님 눈에 들을 리도 없었고 제때로 기성회비를 못 내어 자주 매를 맞거나 벌을 서야 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에는 학교에서 되돌려진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전학 온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애의 어머니는 자주 학교에 들러 선생님을 만나고 시험 때는 그 애의 옆에 서서 아예 같이 시험을 보는 촌극까지 연출하였습니다.
어찌 어찌하다가 교무실 청소를 하다 보았는지 5-6학년 때 1학년 생활기록부를 본 저는 제 눈을 의심하였습니다.
도저히 담임선생님이 썼다고는 볼 수 없는 내용들로 매사에 불성실하고 거짓말을 잘하며 기회주의적이다라고 표현이 돼있었습니다. 기성회비를 제 때 안 냈으니 거짓말 한 아이이고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2학년 때도 저는 여전히 냄새나고 촌뜨기 모습으로 점철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공부에 눈 떠가는 과정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옆자리에 앉은 면 소재지 친구는 구박을 항용 일삼곤 했지요.
<3학년 전반기 담임과의 시간>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주모모 선생님으로 우리 반 삼석이란 아이의 집에서 하숙을 하였습니다. 담임 초반에는 다른 선생님들과 같은 그런 자상함을 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석이란 아이의 입을 통해서 담임선생님의 가정불화가 잦다고 들었습니다. 부부싸움이 늘면서 선생님의 얼굴에선 하루가 다르게 웃음이 사라지더니 수업 중에 창문을 열고 담배를 태우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나마 그때는 나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부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교단에 오르다 자주 자습을 시키더니 나중에는 식수주전자에 막걸리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교단 옆의 책상에 앉아서 학생들 개개인에게 상처가 될 말들을 여과없이 하는 것은 물론-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구요-그 강도는 점점 심해져서 숙제를 안 해온 학생들 체벌도 상식을 벗어나 여자 애들에게 엉덩이를 노출하라는 주문까지 하였습니다. 그 가정불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나중에는 사모님이 집을 나갔다는 소리도 들렸고 그럴수록 선생님의 주사는 심해져 이제 점심 이후에서 오전까지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그거 뭐냐?"
저와 반장은 학교 후문에서 매점 역할을 하는 소사네 집에 급수 주전자에 막걸리를 사 가지고 들어오다가 그것을 목격한 교감선생님이 질문하자 아무소리도 못하고 추궁에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분은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더니
"이거 교감 선생님이 가져갔다고 해라."
며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뺐어 갔습니다.
그리고 난 후 채 일주가 못되어 주모모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셨습니다.
<윤명숙 선생님과 만남>
어린 동심에 자칫 잘못하면 선생님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각인 될 위험이 있었지만 바로 이분을 만나고 나서 그 전의 모든 것은 상쇄가 되었습니다.
남자지만 유달리 빈혈이 많아 전체 조회시간에 아침 햇볕이 조금 내리쬐는데도 제 다리는 자주 후들거리곤 하였습니다.
나중에 스스로 원인을 분석해보면 주변 불결한 생활들로 기생충이 몸 속에 많은데다 성장하는 속도를 영양이 따라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날 새로운 우리 담임이 온다고 하여 전체 조회시간에 제일 뒷자리에 서있었던 저는 몇번이나 이를 악물고 운동장에 서 있다가 겨우겨우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반가워요. 저는 윤명숙이라고 해요."
긴 생 머리에 어찌 보면 다소 이국적인 외모로 기억되는 윤 선생님은 밖에서보다 더 활달히 우리들 앞에서 당신 소개를 하셨습니다.
그때까지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저는 출석을 부르며 선생님이 한 아이, 한 아이의 얼굴을 새기고 있는 중에 급기야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첫 발령 날, 그것도 첫 수업시간에 학생이 쓰러졌으니 아마 무척이나 선생님은 당황하셨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선생님 등에 업혀 양호실로 갔습니다. 다른 기억은 안 나지만 정신이 없는 중에 선생님 등에서 맡던 체취인지, 아니면 주변의 아카시 향기인지 모를 향내 속에 취했으면서도 주변 아이들도 냄새난다고 불결히 여기는 나를 선생님이 업고가면서 불쾌하지는 않았을 까가 그 경황 중에도 걱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선생님은 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그 신고식(?)은 지금도 기억할 것 같습니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선생님은 양호실에 들르셨는지 나중 내가 정신이 든 기색을 보이자 이것저것을 물어보았습니다.
당시에는 너무 숫기가 없고 주눅이 들어 있던 저는 선생님이 질문을 하는 것에 제대로 응대도 못하고 우물우물 거리기만 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신상에 대해서 물어보신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전에 저를 대하던 선생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함을 그분은 풍기셨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은 문학에 관심을 가지셨나 봅니다.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수업 중에 자주 들려주셨는데 나중 요지는 그거였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 책 속에 있다며 학급문고를 만들게끔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독서를 그리 강조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독서습관은 몸에 배인 것 같습니다.
또한 기억에 남을 만한 노래도 자주 가르쳐주었는데 '등대'와 같은 서정성 짙은 노래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같은 곡들이었습니다.
칠판에 써준 몇 개의 시들이 있었지만 아마 '다도해'란 시도 그분이 소개한 시가 아닌 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린 촌아이 감성이 처음으로 문학이니, 음악이니 하는 용어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하였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만큼 열심히 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나중에 크면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결국 그것과 관련된 전공(문예창작)을 하고 공연예술인들의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여기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한번 책에 맛을 들이자 십리 길을 걸으면서도 오직 책에만 매달리고 수많은 위인들과, 동화속 주인공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저는 여전히 계집애 짝꿍에게도 여전히 냄새나고 촌뜨기로 여겨져서 구박을 받는-책상 금을 넘으면 공책이 수난을 당하는 등-아이로만 여겨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내 짝꿍과 급우들의 인식을 새롭게 할 일은 선생님의 질문 하나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당신의 여고시절 이야기인지, 대학생 때 이야기인지 펜팔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처음 편지의 서두에 쓴 '미지의 벗에게' 라는 문구를 예로 들며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 친구들 중 누가 이 뜻을 아는 사람이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10살짜리 초등생들은 당연히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제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고 면소재지 교회의 목사 딸이며 덩치가 저보다 컸던 장은진이라는 짝꿍은 갑자기 저를 추켜세우며 "선생님, 종호가 아는 것 같아요." 하며 거들어 주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아는 답이었지만 대답도 제 스스로 못하는 숫기 없는 아이였습니다. 대신 활달한 제 여자 짝이 어떤 의도인지 모르지만 저를 거들어준 것입니다.
일제히 학급의 친구들은 저를 바라보았고 저는 귀밑까지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을 하였지만 아마 앞에까지 전달이 안되었는지 선생님은 재차 물어보았습니다. 옆에서 통역(?)을 하였던 짝꿍의 입으로 '알지 못하는 친구에게' 란 소리가 전달이 되자 선생님은 놀라해 하시면서 어린 나이들이라서 모를지 알았는데 뜻밖에도 답이 나왔다며 저를 거푸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종호가 책을 많이 읽어서일 거라며 부연설명도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게 말입니다.
그 일 이후로 저는 더 책을 파고들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무시를 하던 여자 짝꿍 애의 시선이 변하더니 나중에는 저에게 질문을 해오기까지 하며 이전과 달리 살갑게 대해주었습니다.
처음으로 반에서 1등도 나고 학교에서 1등 학생에게 얼마의 돈을 저금통장에 넣어주었는데 아마 100원이 채 안되었었고 졸업할 때쯤 화폐변화가 심해 의미가 없다 해도 선생님과의 만남은 저에게 정말 좋은 영향과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는 계기들, 무엇보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였지만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음악에 완전히 몰입해 미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지만 윤 선생님이 가르쳐준 노래를 듣고 혼자 시골길을 걸으며 저는 곡조와 가사를 흥얼거렸고 집에서도 몰래 목청을 돋우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혼자 있을 때만 그랬을 뿐입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이웃 반과 함께 합동음악수업을 하는데 선생님이 큰북을 칠 사람 손들라고 했을 때 마음에서는 몇 번씩 손을 들었지만 결국은 표현하지 못하는 부끄러음으로 지켜보기만 했던 안타까움은 지금껏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지금은 전국의 많은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사방이 터진 지하철과 철도, 공항에서 공연을 진행하고 직접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을 선생님은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싱어 송 라이터를 하며 기타와 하모니카를 목에 걸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잡다한 악기들도 조금씩 다루구요.
해놓은 것은 많지 않지만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고 나니 꼭 그분을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합니다.
그동안도 컴퓨터를 통해 선생님 찾기를 시도해보기도 하고 교육청을 통해서도 해보았지만 75년경 서울 경기지역으로 오시고 현재는 기록이 없다는 소리만 들어왔습니다.
그때 보여주신 선생님의 모습이 한 어린아이의 정서를 어떻게 형성하게끔 하고 지금은 그런 연유로 전국의 철도와 지하철, 공항에서 공연을 지휘하며 작지만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은 삶의 문화를 펼쳐 가는 레일아트 지킴이가 보냅니다.
-박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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