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소진이라는 것은 불편한 관계에서 시작된다.
조카와 갈등들이 계속 되면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나 혼자 왔더라면 고생을 하더라도 혼자 하고, 무슨 일이 생겨도 혼자 책임지면 될 것인데 하는....
하지만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내가 자청했던 일인데다 바로 판을 접고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 방문하였던 분들과도 상의하고 코이카 단원들과도 상의했고 이 메일로 형과도 상의했지만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의 이 단계 까지 생각이 미쳤다.
녀석을 먼저 보내는 방법.
근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이랄까, 아니면 그중 제일 맘에 드는 구석이 있다면 녀석은 불뚝성이 올라와도 자기 입으로 한국 돌아가겠다는 소리는 아예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돌아가서 뭐하게요. 아무것도 아닌데.”
“..........”
기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한마디 하였다.
“그렇게 잘 아는 녀석이 기본적인 학업생활도 안 하냐.”
그의 학업을 위하여 몇 가지 방법을 다 써보았다.
하루 에스빠뇰 공부한 것을 노트에 몇 페이지 이상 적으라고 했더니 글자 크기가 보통을 초월하여 칸을 대충 채우고 검사를 받거나 밀린 이후에는 아예 페이지가 언급이 안 된 것을 이용하여 페이지 있는 것만 찢어버리고 목표량을 채웠다고 내놓는 등 내 점검만큼 녀석의 대응수법도 늘어간다.
어느 정도 어르고 달래기도 하다 그도 포기하였다.
그런 점검도 아이의 학업을 도우기 시도한 것인데 하루 이틀을 넘기고 숙제가 늘어갈 수록 아이도 다른 변칙을 써 오히려 녀석의 양심만 더럽히는 것 같아서다.
“형, 애가 버티기로 하면 진짜 방법이 없네요. 나까지 공부 하는데 지장이 많으니.”
“할 말이 없다. 안 봐도 내 자식이고 키워봐서 안다. 비록 돈은 들어갔다 해도 아이에게 넓은 세상 경험 시킨 걸로 쳐도 되고 그곳에 보낸 거 난 후회 안한다. 힘들면 이제 한국으로 보내라. 거기에서도 개선의지가 안보이면 여기에서 꼭 대학 못 보내더라도 지 먹고 살 기술이라도 길을 열어줘야지. 검정고시나 대안학교등 길은 여러 가지 있으니까. 알다시피 우리나라 대학 나왔다고 다 취업하는 것도 아닌데 공부는 진작 흥미가 없는 줄 알았고 그나마 소질 있다던 음악마저도 게으름 피우면 이제 달리 방법이 없잖니.”
체념어린 형의 나직한 목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현재 조금 버겁다고 조카 녀석을 포기하면 녀석의 말마따나 이도 저도 아닌 상태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인데 아이의 일생에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 기회에 누가 될 오점은 찍고 싶지 않았다.
녀석과 매일 거듭되는 불편한 감정을 감수하면서도 그래서 시간 점검자처럼 한마디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학원 갈 시간 된 것 같다.”
근데 뜻밖에 해결은 엉뚱한 데서 왔다.
어느날 오후쯤 해서 밖의 칠리 강가를 산책하고 집에 돌아오니 녀석이 침대위에서 혼자 멍하니 있어 별일 없나 물었더니 무언가 말할 듯 말듯 한다.
“왜, 할 말 있어?”
“아니예요. 누구 때문에...”
그러면서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운을 뗀다.
가까운 내 동료와 무슨 일이 발생한 모양이다.
여기에 적을 성질의 것은 아니어서 생략하지만 피가 섞인 가족보다 야단치지 않는 페루 사람들 말을 더 새겨듣고 그들과 더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녀석은 그날의 작은 사건이 결국 여기에서 자기는 한국인이고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환기시켜준 것 같다.
아마 그렇게 대화의 물꼬가 트여져서 2시간 반 동안 녀석과 이야기를 했었더랬지 아마.
“들어보렴. 너는 정말 축복 받은 세대란다. 아빠를 비롯해서 나나 이천 작은 아빠(공무원), 분당고모까지 누구도 제 나이에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하나도 없이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단다. 아빠가 중학교만 졸업하고 일찍 사회에 뛰어들었지만 지금은 대학원과정까지 마치고 목사가 되었고 난 대학학부를 30살에 졸업했단다. 1년 벌고 1년 휴학하는 식으로.”
그러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대학원도 마찬가지란다. 두 군데나 다녔지만 내가 졸업하기에는 경제적 상황이나 여건이 허락지 않아 결국 아직도 여전히 졸업을 못하고 있고, 이천 작은 아빠는 고교마저도 돈이 없어 국비로 다니는 국립기계공고를 나와 나중에 사회생활하다 독학고사로 수석을 하면서 교육부 장관상도 받고 공무원문인이 되면서 국무총리상 행정자치부 장관상까지 받았잖아. 분당고모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사회생활하다....”
우리 집은 3남 1녀이며 형과 동생은 모두 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동생은 성격처럼 꼼꼼하고 정교한 전문적인 글로 공무원문인으로 활동하고 있고, 형은 자연을 닮은 심성으로 본인이 지닌 신앙처럼 크리스쳔문인으로 활동중인 것을 조카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가정사를 일일이 들춰내면서 지금 생각지도 않은 유학이란 길에 들어선 상황을 조카에게 비교 열거하면서 그렇게 줄곧 서서 말을 하였다.
“난 클래식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교회는 물론 고교도 3학년때 피아노가 들어와 그것을 만지려고 밤에 몰래 음악실 문을 열고 들어가 연습하다 이해 못한 몇몇 숙직선생님들중 몇분은 아예 미친놈이란 극언까지 써가면서 나를 문제아 취급 했지. 지금뿐 아니라 작은 아빠가 대학을 다닐 때도 돈 없으면 음악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단다. 그래서 음악은 정말 좋아했지만 그것은 취미 이상으로만 머물렀었고 전공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잡아온 꿈을 걸어온 것이야. 그래도 지금은 되려 잘된 것 같아. 클래식음악을 하진 못했지만 지금 이렇게 공공공연예술 발판을 만들었고 안데스음악과 라틴음악의 매개체를 국내에서 담당하게 되었으니.”
7-8년전 국내 1호로 지하철 상설공연을 진행하면서 겪었던 상처가 된 아픈 이야기들도 죄다 줄줄이 쏟아냈다.
한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거친 음악인들과 활동을 하면서 사이가 좋을 때는 앞으로 어디가서 아마츄어라는 소리하지 말라며 내 음악에 대해 극찬을 하다 어느 일로 소원해지자 뒤에서 음악전공도 안한 주제에~라는 소리를 들었던 아픔까지.
사실 통기타 음악이 무슨 전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느 사회나 적어도 자격요건 운운할 때 전공을 안 했다는 것은 이런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녀석에게 주지시켰다.
그것까지 열거하면서 조카에게 하기 싫어하였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것들이나 지금 음악의 단계를 밟아 가는 것 자체 모두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감사할 일 아니냐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언급은 그렇게 마무리한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두 가지 중 하나만 갖춰져도 불편함 없다고.
돈이나 확실한 실력, 그래서 작은 아빠는 돈과 인연이 없는 듯 해 내 분야에서 실력을 키우려 했고 광적으로 매달렸던 음악생활이나 독서를 한 달에 평균 40-60권씩 해나갔다고 하니 녀석이 정말이에요 하면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래, 너도 라틴음악이 한국에서는 인기가 있는 줄 알지만 그것을 제대로 전공하고 온 사람은 아주 드물단다. 그러니 여기에서 제대로 배워가고 또 일전에 니 스스로도 말한 것처럼 월드음악을 하고 싶으면 그전에 리더가 적어도 영어와 에스빠뇰은 능수능란해야 하지 않겠니. 물론 욕심이지만 중국어까지 한다면 지구상 절반의 인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네게 허락된 무대는 훨씬 더 많이 열려있을 거야. 무슨 학교공부를 잘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들과 호흡하고 이끌기 위해서라도 언어는 기본이니까. 말만 조금 통하면 네가 할 일은 너무도 많고 너와 만나서 일할 사람들은 널렸단다.”
“네, 맞아요.”
녀석은 그날 2시간 반 동안 내가 서서 말하는 것처럼 본인도 서서 모든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로 녀석의 확연히 변화가 곳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했다.
http://cafe.daum.net/7080folk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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