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뫼지기(큰형)

안개와 아이

종이인형 꿈틀이 2001. 10. 16. 20:46

*** 안개와 아이 ***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궁산은 동네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해서 활뫼 (弓山 )라고 한다.
동네 앞에는 일제시대 때 둑을 막아서 형성된 커다란 저수지가 있고, 동네 뒤에는 활처럼 산이 동네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습도가 많은 날은 안개가 자주 끼었다.

여기 궁산에서 태어난 서진이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다.
만 6살이지만 형과 누나가 있어 잘 따라다니고 있었다.
학교가 면소재지에 있어서 스쿨버스가 제일 먼저 궁산에 온다.
그러다보니 아침은 항상 큰소리가 났다.
"일어나라."
"세수해라."
"빨리 밥 먹으라."
"옷 입으라"

서진이는 아직 습관이 안 돼서 항상 늦는 바람에 아침이면 늘 큰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빠짐없이 학교를 가는 것이 대견스럽다.
사실, 집에 있는 것보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지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동네에는 저와 놀아줄 친구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방안에서 뭉기적대다가도 일단 현관문을 나서면, 앞 서 가는 형과 누나를 잡으려고 잽싸게 나선다.

그 날도 예전처럼 신발을 신기가 바쁘게 현관을 나서면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너라"
이렇게 하고 아이는 현관문을 나섰다.
그런데, 잠시 후에 서진이가 돌아왔다.
"너 왜 안가니?"
"저~기...."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작은 손가락을 가리킨다.
나는 서진이의 손목을 잡고 밖에 나갔다.
"아~하~"
알고보니, 안개가 잔뜩 끼어 전방 백 보 앞도 안보였기 때문이다.
전같으면 모퉁이를 돌아가는 형과 누나를 잡으려고 달음박질 할텐데 안개로 인하여 보이지 않자 아이는겁을 내고 들어온 것이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손을 가르키며 말했다.
"서진아. 지금 안개가 끼어서 안보이니까 그러지, 저 앞에 분명히 형과 누나가 걸어가고 있단다. 저 만큼 가면은 보일 거야, 걱정 말고 어서 가봐라".
그때서야 용기를 얻었는지 아이는 안개 속을 헤치고 달려갔다.
이제 서진이는 알았을 것이다.
안개 때문에 앞이 안 보여도 그래도 달려가면 자기가 가는만큼 보인다는 것을....,

서진이의 이름이 말해주고 있다.
새벽 서(曙), 나아갈 진(進),
새벽에 진통이 와서 고창산부인과 병원에 도착한지 5분만에 세상에 나와 버렸다.
그래서, 새벽에 나아가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 어찌 보면 안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앞일을 모르기에 더욱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이것을 교묘히 이용하여 돈벌이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리석게 끌려가는 인간들도 있다.
그렇지만 안개로 앞이 안 보여도 가야 할 길이 분명 있다면 가면 되는 것이다.
다 알지 못해도, 다 볼 수 없어도 가면 가는 만큼 알게되고 보게 되는 것이다.
가다보면 실수도 있고 넘어 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갈 때만이 발전이 있고 인생의 발자취가 있는 것이다.
문득 옛 시조가 떠오른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은.
사람들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농촌을 떠나버린, 그리고 아이들이 귀한 삭막한(?) 이 농촌 지역에 내려와서 거한 지 9년이 되어간다.
농촌에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해서 큰 목회를 해서 성공(?) 하고자 하는 포부도 있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작은 꿈, 확신이 있었다.
이 농촌 사회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5년간의 건축을 하면서 주위에 있는 재료를 최대한 이용했다.
선조 들의 지혜를 살려 있는 그대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번의 시행 착오가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 생각보다 훨씬 잘 지어졌다.
사람들은 나에게 전공을 뭘 했는지 물어 보지만 전공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열심히 하다보니 된 것이다.
생각지 않던 지혜, 생각지 않던 재료들....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가다보니 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 있다 .
미국에서 일명 땅콩박사로 불렸던 조오지 와싱턴 카아바이다.
내가 군대생활 중에 책으로 만났던 인물이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오 ! 주저앉지도 말고 멀거니 서 있지도 말자.
누구에게든 할 일이 너무도 많으니라."
혹 어떤 사람들처럼 크게 성공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내게는 한 가지 재간이 있으니,그 재간을 갈고 닦고 나가리라 라고---.

-활뫼에서 박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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