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뫼지기(큰형)
과일나무 한 그루를 소망하더니
종이인형 꿈틀이
2001. 10. 10. 22:53
복잡한 일이 너무 많아서 칼럼을 이제사 올립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겠습니다.
바쁜 것은 육체만 조금 피곤하지만 스트레스는 영혼까지 죽게 만드는 것을 나날이 체험한 탓에
-박우물-
"가끔씩 나는 일손을 멈추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할 때가 있단다."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 형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집은 시골동네에서 제일 위에 위치하여 있었다. 뒷재에는 무덤이 비석거리처럼 군데군데 널려 있고,
상을 지내는 석상이나 좌우에 서있는 비석은 우리 악동이들의 놀이터였다.
한참 기타를 배울 때 밤마다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던 곳이지만 우리 집에는 아쉬운 것이 있었다.
웬만한 집이면 다 있는 유실수 한 그루도 없었던 것이다.
울타리로 에둘러진 옆집 할아버지네는 딸기밭도 있고 대밭도 있어 가끔 우리의 침범의 대상이 되었지만,
아쉽게도 우리집은 아버지 나이를 닮은 외솔만이 담벼락 각진 곳에 서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개샘을 지나 제법 떨어진 외딴집 현숙이네로 밤을 주우러,
감을 주우러 가는 것이 우리 형제들의 낙이었다.
없는 부지런까지 떨며 흔치 않은 단감나무가 있는 금숙이네 집에 떨어진 감을 주우러 가는 것도 비온 후의 새벽 일과였다.
그렇다고 텃밭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간식이란 어머니가 따오는 산딸기나 약굴 밭에서 일을 마치고
또아리 위 삼태기에 얹은 머루를 어머니보다 더 찾는 안부였다.
치기어린 행동은 가끔 월담을 하여 현숙이네 장독대까지 몰래 진출을 하거나
금숙이네 두레우물에 늘어진 앵두를 서리하러 좌우를 살피다 머쓱해진 경우도 있었다.
딸부자집 숙현이네 딸기밭도 나의 낮은 포복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새마을 운동은 경제적인 조금의 윤택함을 시골에 부여했는지 모르지만
기존의 수채화 화폭을 바꿔버린 사건이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오래된 팽나무나 운치 있는 나무들을 왜 죄다 베라 하였는지 모르겠다.
도심지라 길이 나는데 지장이 있거나 실생활에 막대한 걸림돌이 된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그 외진 마을 -참고로 내가 살았던 고향마을은 아직도 비포장이다- 에서
20년 전에 벌어진 사건은 비단 우리마을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야산 개발이 되면서 등걸들이 뽑혀지고 시뻘건 지역의 산 흙위에 석회가 뿌려졌다.
수익사업 일환으로 우리 고장은 수박이 특산물로 자리잡았지만
초창기에는 낙화생이라는 땅콩과 드물게 배밭을 조성하는 이도 있었다.
큰 배밭을 일군 충호네는 장성 토박이지만 갈재를 넘어 개간지를 찾다가
우리 동네까지 흘러들어와 약굴에 블록 집을 임시방편으로 짓고 살았다.
그곳은 또한 아버지가 삽자루로 일구어낸 전답이 있던 관계로 자연 우리집과 살가운 사이가 되었다.
배나무 밑의 남은 휴경지는 아버지가 소작료 없이 벌어먹고 살아서
우리는 철조망도 없는 배밭을 핑계삼아 무시로 드나들었다.
배가 채 익기도 전에 과실을 탐내던 우리는 밭일을 하다가 주위를 살펴보고
몰래 배를 따서 먹다보면 설익은 배는 마치 무를 씹는 것처럼 텁텁한 맛이었다.
"너희들 배 따먹었지?"
한참 밭을 메고 있는데 충호 엄마가 와서 다그친다. 아까 충호 녀석이 기웃거리더니 우리 남매가 열매에 손을 대는 것을 보았나보다.
아니라고 사래치기에는 먹다가 급히 내던진 배 조각이 기민치 못한 여동생의 처리로
바로 고랑에서 발견되어 고개를 푹 수그려야 했다.
과수원은 둘째치고 이웃집에 있는 유실수는 형에게도 항상 부러움이었나보다.
나중에 시골에 산다면 과일나무가 있고 화단을 꿈꾸던 형은
지금 앞에는 저수지, 뒤는 산책하듯 동백숲, 선운사를 걸어 올라갈 산이 막아주는 곳에서 시골목사로 살고 있다.
빨간 벽돌이 아닌 흙과 통나무, 돌을 주재료로 만든 교회건물과
사택에서 쑥부쟁이, 분꽃, 인동화, 무화과, 단감, 파라칸사, 상사화등 수목과 화초가 100여종이 넘는 정원을 부지런히 손질하며 가끔 하늘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했다.
"이게 정말 꿈은 아닌가" 하고.
추석-부모님과 형이 있는 마을은 비록 우리가 태를 묻은 곳은 아니지만 늦은 귀향을 탓하지 않는다.
"너 맛보게 하려고 남겨 두었다."
속 벌어진 채 단내를 풍기는 무화과를 형이 따 건네준다.
떫지 않은 단감은 담 넘어 고샅까지 가지를 뻗쳐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마당은 금잔디와 토종잔디까지 깔려 맨발로 걸어 다녀도 좋을 듯 싶다.
과수 한 그루라도 소박하게 소망했던 형제들의 꿈을 형은 먼저 이루고 살고 있다.
다시금 서울로 돌아오는 내 가방에는 손닿는 위치에서 딴 단감들이 한 가득 담겨져 있다.
이틀이 가기 전에 고향의 흔적은 배속으로 사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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