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들의 이야기
쎈다이를 돌리며 2
종이인형 꿈틀이
2001. 7. 31. 15:51
더운, 그래서 추운 여름입니다.
냉방이 너무 잘된 도서관에서 여름을 나는 탓에.
경찰대학 상징탑에 탐스런 장미가 피었습니다.
올 봄에 100주의 사철장미를 심었었는데,
빨강, 노랑, 하양, 핑크의 색색들을 뽐내며 함박 피었습니다.
작년에 비룡지에 심었던 연꽃도 종지만한 꽃을 피웠구요.
잠자리 잉잉거리는 하늘이 무척 부산스럽습니다.
내리 양지건의 글을 올립니다.
가끔은 전통한복과 고무신 차림에
짧은 앞머리에 물을 들이고 귀고리까지 찬,
한때는 수염도 기르던 재밌고도 자유로운 사나이 양지건.
신림동의 난곡마을에서 야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록그룹의 싱어로서 노래를 부르던 그의 모습도 상상해 보세요.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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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쎈다이를 돌리며 2 ***
- 양지건 -
1. 그 아저씨의 여러 이름
우선, H반장은 그를 김씨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가장 흔한 명칭이어서 그 아저씨와 연배가 비슷한 다른 아저씨들도 그렇게 부른다.
나랑 같은 팀으로 일을 하는 대학생들은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아저씨에서
쎈다기 잘 돌리는 아저씨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이 아저씨를 부른다.
물론 바로 앞에서는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하지만 난 이 아저씨의 정체를 처음 만난 그 날 단박에 알았다.
나에게 한참 일을 가르쳐 주시던 아저씨가 내가 힘들어 하니까 "바쁘지?" 라고 물으셨고
나는 무의식 중에 "일 없습니다" 라고 대답해 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아저씨와 나 사이에는 어떤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아저씨가 없는 자리에서 다른 아저씨들이 그 아저씨를 중국놈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며 난 화가 났었고,
그 아저씨랑 조금이라도 친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 아저씨는 참 일을 잘했다.
한번 쎈다기를 잡으면 놓을 줄을 몰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살갑게 대했다.
서울 깍쟁이의 몸에 밴 친절함이 아니라 조금은 무뚝뚝한 가운데 언뜻 비치는 그런 살가움.
그리고 그는 골초였다.
한 번 피우기 시작하면 꼭 두 대 이상을 펴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중국 사람들처럼 손이 데일 정도로 끝까지 피우는거다.
수요일 회식 자리에서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저씨는 중국을 떠나 온지 7년이 넘었다고 하셨다. 다행히 부인과 함께 지내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 10년을 채운 뒤 다시 중국으로 들어 갈 예정이라고 하셨다.
그 아저씨의 집은 공교롭게도 훈춘에 있었는데,
거긴 내가 작년에 매 주 가던 곳으로 난 마치 고향 사람을 만나 것처럼 반가웠다.
그 아저씨는 중국 사람이지만 나보다 요즘의 중국 사정을 더 모르셨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이 요즘 얼마나 급속도로 변하는데
근 7년을 중국에 한 번도 안 가셨다니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유쾌하던 술자리는 아저씨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썰렁해졌다.
아저씨의 딸은 올해 고중에 들어갔다고 하니 초등학교 저학년에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헤어져 산 것이다.
아마 얼굴도 그때와는 몰라 보게 달라졌겠지.
훈춘에서 아저씨의 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참 많이 봤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아저씨의 딸과, 내가 아는 훈춘의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자꾸 슬퍼졌다.
아저씨는 그 애는 아매(할머니) 집에 있으니 문제 없고,
난 그 애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감정을 숨기셨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물론 그 아저씨의 마음과는 비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수 많은 조선족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당장 강남 근처의 식당만 가도 한 분 이상 없는 곳이 없다.
다들 자신의 이름과 말을 숨기고 다른 사람이 붙여 준 이름으로 그렇게 살고 있다.
2. 열심히 일하면
지난 주 월요일 맨 처음 공사 현장을 찾아가 H반장을 만났을 때, 나는 제일 먼저 일당이 얼마냐고 물었다.
대답은 원래는 4만원인데 열심히 하면 더 생각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한참 때는 7만원까지 받았던 적도 있었으나 IMF 이 후로 이 전 가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렇게 몇 년을 흘러오고 있는 중이다.
나는 얼른 머리를 굴린 결과, 직업 소개소에서 소개비 떼이고 먼 곳까지 가느라 차비 쓰느니,
돈이 그리 많지는 않더라도 자취집에서 가까운 여기서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군다나 열심히 하면 더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조건이 주는 굴레를 이 때에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보초를 설 때, 늘 열심히 서다가 딱 한 번 철모를 벗은 날 하필이면 중대장에게 걸려 군장 싸는 일,
맨날 자는 녀석이 딱 한 번 깨어 있다가 마침 대대장에게 인사 한 번 잘했다고 포상 휴가를 가는 일.
어찌 군대뿐이겠는가? 세상에는 열심을 측정할만한 적절한 도구가 없다.
열심은 본인 아니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 정도만 알 수 있다.
두 기준 중 물론 더 정확한 것은 정직한 자신의 양심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보니,
평가는 평가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의 손에 전적으로 달린 문제가 되어 버렸다.
내가 H 반장을 신경 쓰게 된 것은 일을 시작한지 한 삼일 정도가 지나고 나서이다.
일도 어느 정도 손에 익고, 하루 종일 단순한 작업을 하면서 하는 일 중 가장 큰 낙이
오늘까지 얼마를 벌었는지 계산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루 일당을 4만원으로 했을 때와 4만 5천원으로 했을 때,
그 총액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결국 난 점점 H 반장의 눈을 의식하게 되었고,
그가 옆에 있으면 쉬는 것도 맘이 편하지가 않았다.
노가다 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담배는 한라산이다.
왜냐면 그게 가장 오래 가기 때문이다.
노가다 판에는 "쉬었다 합시다" 라는 말이 없다.
" 담배 한 대 피웁시다" 라는 말이 이를 대신한다.
내가 눈치를 보는 것이 사실 얼마나 큰 압박이 되겠는가?
노조도 없고, 계약도 없고, 퇴직금도 없고,
반장의 말에 당장 내일 안 나올 수도 있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문제지.
이제 열심히의 의미는 바뀌었다.
설렁설렁, 대충대충 일을 하더라도 진도를 빨리 빨리 나가고 반장 눈에 든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요, 재주 없이 지 할 일만 하는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해도 하루 4만원을 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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