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물(둘째형)

내가 내 입으로 말하는데

종이인형 꿈틀이 2004. 3. 3. 21:44

 
“옛날 같았으면 광대들이지.”
“그렇지, 길거리판에서 터 잡고 주로 놀았으니까.”
2003년도 추운 겨울 끝자락이지만 무대나 객석 모두 상관이 없는 듯 하다. 항상 토요일이면 사당역은 종합공연의 형태로서 진행되고 있고 어느 장르를 선보이고, 어느 층이 나와서 공연을 하여도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으니까.
나도 이제는 여유를 부리며 관객들과 같이 무대주변 좌우를 돌고 있는데 두 중년의 남자들이 광대 운운하는 소리가 들린다. 자기들끼리 무슨 대화를 하는가보다 지나치려는데 이어 들리는 소리가 가관이다.
“계집애니까 기생이라 보아야겠지.”
“맞아, 그때 기생들은 다 가무에 능해야 했지.”
이게 무슨 소리인가? 공연중간에 여중생 대금주자가 찬조출연을 하여 연주중인데 누가 들어도 무대에서 연주하는 아이를 가리키며 40대후반 정도 되는 이들이 무슨 역사적인 지식을 소유한 양 옆의 사람들을 의식하지도 않고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뱉고 있었다. 그 옆자리에 여중생의 아버지가 있는데도 말이다.
“무슨 말들을 그렇게 해요.”
그냥 못 들은 척 지나가기에는, 아니 안 들었다면 모르지만 목울대를 울리며 화난 말투로 내가 소리를 높이자
“내 입으로 말도 못하고 사나. 대한민국은 자유국가인데..”
되려 무어라 하면서 한 남자가 시선을 외면한다.
그 상황이라면 아이의 아버지가 화를 낼 법 한데 그는 싸움이 되겠다 싶은지 되려 나를 말린다.
곧바로 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올 때도 점잖게 왔었고 다른 취객들처럼 소란을 피운 것도 아니지만 공연을 보면서 하필 그런 표현으로 괜한 타박이나 받으면서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 터인데.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비단 행동이 두드러져 보이고 목소리가 크다고 해의 강도가 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지친 삶의 더께를 조금이라도 벗겨내려고 시도하는 레일아트 식구들의 몸짓은 여러 유형으로 표출된다. 어떤 이들은 활달한 춤을 통하여서 시각적인 긴장이완을 시켜주기도 하고, 처음 레일아트의 출발이 그러했듯 통기타를 들고 잠시잠깐 느림의 미학과 잊고 지내던 속도 빠른 일상에서 정서의 편린들을 재 조합하게끔 하는 소박한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는 가 하면, 그저 주목하지 않아도 발걸음을 뒤따라가는 여운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악기연주자들의 행위가 있다.

관객들의 반응만 본다면 힙합중에서 브레이크 댄스만한 공연도 드물 것이다. 워낙 동작이 격렬하고 기교면에서 다양하다 보니 주로 10대나 20다 초반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데 이들을 가리켜 ‘비보이’라 부른다.
가끔은 이런 아성에 ‘비걸’ 들이 등장한다. 힘이나 기교로 보면 남자들의 흡인력에 비할 수 없지만 여자 애들의 동작은 또 그만의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사당역에서 '비걸'들까지 가세한 공연을 마치고 의자 정리를 하는데 몰려 있는 여자애들을 보고 할아버지 한 분이 말을 건다.
우리나라 사람이 공연을 보고 표현하는 데 인색하다고 하여도 바로 관심을 표하거나 감사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 애들에게 다가가는 할아버지도 그런 부류로 보았다. 눈이 나빠서 내 귀가 상대적으로 발달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일에 익숙해져 금방 사람을 가려내는 것인지 신경은 그 애들 주위로 향하였다.
“니들은 춤만 치지”
“......”
아이들은 그 할아버지가 무슨 의도로 말을 꺼내는지 몰라 의아한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본다.
“니들은 다 멍청이들이야. 대가리에 XX만 들어있는..”
“뭐라구요?”
한 여자애가 발끈하며 대들 기세다.
“할아버지. 거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저리 가요. 어디서..”
짐을 나르다 겁결에 내가 큰소리를 지르자 할아버지는 순순히 한 켠으로 사라진다. 그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자신의 잣대를 들어 격려의 말이 아니라 생각없는 언어로 상처를 만드는 부류였던 것 같다.

앞에 언급한 사람에 비해 그 할아버지는 지금도 한 주 걸려 사당역 공연장에서 볼 수 있다. 의자에 앉아 보는 것도 아니고 항상 뒤에서 배회하거나 비켜서 밤 같은 것을 까먹고 있다가 공연이 끝나면 나와는 마주치는 것을 꺼리면서 이따끔씩 공연자들에게 한마디 던지는가 보다. 그 혀에 의해서 사람의 경중이 달려있다는 것을 인고의 세월동안 삶의 무대에서 수없이 체득하였을 터인데.
“저 할아버지 무어라 하던가요?”
궁금증이 발동하여 조금 전까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여성 연주자에게 가서 물어보니
“몰라요. 자기는 듣는 귀가 있어서 우리 연주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계속 입에 발린 소리만 하네요. 근데 처녀때 무척 고았을 거라는 소리는 연주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
 
-박우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