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물(둘째형)
대화에 대한 몇가지 소묘
종이인형 꿈틀이
2001. 3. 21. 08:26
박우물입니다.
19일에 글을 올렸더니 날라가고,20일밤에 또 낑낑대며 올리자 다시 날라가고-----------
결국 아침에 피시방에 와 글을 올립니다.
94년도 작인가 봅니다.
==================================================
하나-
두사람 모두 벙어리였다.
남자는 안경을 썼고 보통사람보다 큰 키라는 인상을 주었다.
여자는 캠퍼스에 적을 두면 하나같이 머리에 퍼머손질을 하는 것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염색을 하였을까? 아니면 원래 갈색머리였을까?
알맞게 길러진 머리카락이 드리운 어깨위엔 가끔 남자의 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네들은 손을 잡고 정문을 나서 식당을 찾거나, 정원 한 켠에서, 또 이젤판이 널려있는 화실에서 한사람이 안보이면 이상할 정도로 간격을 바투 잡아당기며 지냈다.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알만한 이들은 입을 모두었다.
봄기운이 흐드러지게 신명나는 광장에서 그네들이 선보인 디스코솜씨는 축제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박수를를 자아냈다.
만약 저들이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면 이러한 박수를 받을 수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여자가 손짓을 하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다급한 손짓끝에 여자는 여자는 입을 열었다.
"잠깐만."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이었다.
벌려진 입에서 나온 것은 순하디 순한 짐승의 슬픈 우짖음 소리같이 "으어어" 하는 외침뿐.
구체적인 음절이 단어라는 옷을 입을 때 의사소통이 되는 것인가.
남자가 바라보았다면 그녀의 지금 소리만으로도 휼륭한 언어가 되었을 게지.
아니 그들은 바라보기만 하여도 충분히 소리를, 그리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거야.
한참을 망연히 서있던 그녀 또한 사라진 후에도 나의 시선은 그 자리에 붙박혀 떠나지 않았다.
둘-
365일 바다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변화를 바라보며 야간 초병이 되었다.
해일이라도 날 것처럼 사납게 꿈틀대다가도 나직한 해조음만을 안겨주는 잔잔한 바다. 달빛을 길게 늘어뜨린 은한의 바다--
일반 사병들이 두 사람이서 전우조로 초소에서 경계를 서는 깊은 밤이면 어김없이 나의 동료 해치는 내 옆에서 동행자가 되었다.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가파른 둔덕 순찰길을 오를때면 해치는 서너발자국 앞서다가 내가 제대로 보조를 맞추나 보려고 자주 뒤돌아 보곤 하였다.
우리들의 대화는 항상 일방적이었다.
"해치야! 오늘 아빠가 말이야-"
녀석은 묵묵부답이다.
반응을 보인다면 세퍼드가 자랑하는 긴 귀를 곧추 세우거나 꼬리를 뒤흔드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푸르른 청춘의 저당품 군복을 벗으려 해치의 막사에 들어서던 날.
"해치야. 아빠 간다. 다른 아빠 만나서 잘 살아."
녀석은 자꾸만 내 바지가랑이에 얼굴을 부벼대며 파고 들었다.
울컥 묻어나는 감정을 추스리며 차마 마지막까지 그 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섰다.
높게 우짖는 녀석의 울음을 뒤로 하고.
셋-
버스 앞 좌석에 앉으면 한가지를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같은 회사 차가 서로 맞닥뜨리면 양쪽이 씽씽 달릴 때는 그냥 서로 손만을 흔든다.
그러나 정체나, 신호대기 상태에서는 기사 아저씨는 상대편 동료를 향해 무어라 말을 던진다.
물론 그쪽에서도 이쪽에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거리이다.
정말 객관적인 시선으로 헤아리면 그분들의 모습은 웃음의 소재이다.
그러나 서로 엉뚱한 대화-한쪽에선, "길막혀." "잘있네."-라고 하여도 그네들은 충분한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넷-
"모모야. 오늘 이야기 고맙다."
사람들은 모모 앞에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늘어 놓다가 자리를 털며 이렇게 말하였다.
모모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는데.
(미카엘 엔더의 소설)
다섯-
처음엔 편지만을 고집하다 문명의 이기인 전화의 혜택을 누구보다 잘 누리는 사람이 되었다.
혼자 있다는 이유로, 또 어느 시간이나 전화를 받을 수 있다는 강점에 내 먼저 전화를 건 적은 별반 없지만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꼬박 밤을 새운 적도 있다.
말하는 입보다 들어주는 귀가 된다고 하였는데 나는 모모가 아닌 것을 자주 깨닫는다.
여섯-
대화란 두 사람이서 언어의 형식을 빌어 주고 받는 것이라고 개념규정을 한다면 대화외의 의사소통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적절한 묘사가 필요할 성 싶다.
우리 동아리에서 대화의 단절이란 말이 나오거나 터 놓을 이 아무도 없다는 식의 감정이 지배적이라면 그 물꼬는 누가 터야 할까?
마주 보는 것으로, 또는 귀기울이는 것으로, 그리고 따스한 애정과 이해가 깃들 때 대화는 동면기를 벗어나 싹틔우는 발아의 과정을 서두를 것이다.
박우물의 열일곱번째 글-
19일에 글을 올렸더니 날라가고,20일밤에 또 낑낑대며 올리자 다시 날라가고-----------
결국 아침에 피시방에 와 글을 올립니다.
94년도 작인가 봅니다.
==================================================
하나-
두사람 모두 벙어리였다.
남자는 안경을 썼고 보통사람보다 큰 키라는 인상을 주었다.
여자는 캠퍼스에 적을 두면 하나같이 머리에 퍼머손질을 하는 것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염색을 하였을까? 아니면 원래 갈색머리였을까?
알맞게 길러진 머리카락이 드리운 어깨위엔 가끔 남자의 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네들은 손을 잡고 정문을 나서 식당을 찾거나, 정원 한 켠에서, 또 이젤판이 널려있는 화실에서 한사람이 안보이면 이상할 정도로 간격을 바투 잡아당기며 지냈다.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알만한 이들은 입을 모두었다.
봄기운이 흐드러지게 신명나는 광장에서 그네들이 선보인 디스코솜씨는 축제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박수를를 자아냈다.
만약 저들이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면 이러한 박수를 받을 수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여자가 손짓을 하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다급한 손짓끝에 여자는 여자는 입을 열었다.
"잠깐만."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이었다.
벌려진 입에서 나온 것은 순하디 순한 짐승의 슬픈 우짖음 소리같이 "으어어" 하는 외침뿐.
구체적인 음절이 단어라는 옷을 입을 때 의사소통이 되는 것인가.
남자가 바라보았다면 그녀의 지금 소리만으로도 휼륭한 언어가 되었을 게지.
아니 그들은 바라보기만 하여도 충분히 소리를, 그리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거야.
한참을 망연히 서있던 그녀 또한 사라진 후에도 나의 시선은 그 자리에 붙박혀 떠나지 않았다.
둘-
365일 바다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변화를 바라보며 야간 초병이 되었다.
해일이라도 날 것처럼 사납게 꿈틀대다가도 나직한 해조음만을 안겨주는 잔잔한 바다. 달빛을 길게 늘어뜨린 은한의 바다--
일반 사병들이 두 사람이서 전우조로 초소에서 경계를 서는 깊은 밤이면 어김없이 나의 동료 해치는 내 옆에서 동행자가 되었다.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가파른 둔덕 순찰길을 오를때면 해치는 서너발자국 앞서다가 내가 제대로 보조를 맞추나 보려고 자주 뒤돌아 보곤 하였다.
우리들의 대화는 항상 일방적이었다.
"해치야! 오늘 아빠가 말이야-"
녀석은 묵묵부답이다.
반응을 보인다면 세퍼드가 자랑하는 긴 귀를 곧추 세우거나 꼬리를 뒤흔드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푸르른 청춘의 저당품 군복을 벗으려 해치의 막사에 들어서던 날.
"해치야. 아빠 간다. 다른 아빠 만나서 잘 살아."
녀석은 자꾸만 내 바지가랑이에 얼굴을 부벼대며 파고 들었다.
울컥 묻어나는 감정을 추스리며 차마 마지막까지 그 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섰다.
높게 우짖는 녀석의 울음을 뒤로 하고.
셋-
버스 앞 좌석에 앉으면 한가지를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같은 회사 차가 서로 맞닥뜨리면 양쪽이 씽씽 달릴 때는 그냥 서로 손만을 흔든다.
그러나 정체나, 신호대기 상태에서는 기사 아저씨는 상대편 동료를 향해 무어라 말을 던진다.
물론 그쪽에서도 이쪽에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거리이다.
정말 객관적인 시선으로 헤아리면 그분들의 모습은 웃음의 소재이다.
그러나 서로 엉뚱한 대화-한쪽에선, "길막혀." "잘있네."-라고 하여도 그네들은 충분한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넷-
"모모야. 오늘 이야기 고맙다."
사람들은 모모 앞에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늘어 놓다가 자리를 털며 이렇게 말하였다.
모모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는데.
(미카엘 엔더의 소설)
다섯-
처음엔 편지만을 고집하다 문명의 이기인 전화의 혜택을 누구보다 잘 누리는 사람이 되었다.
혼자 있다는 이유로, 또 어느 시간이나 전화를 받을 수 있다는 강점에 내 먼저 전화를 건 적은 별반 없지만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꼬박 밤을 새운 적도 있다.
말하는 입보다 들어주는 귀가 된다고 하였는데 나는 모모가 아닌 것을 자주 깨닫는다.
여섯-
대화란 두 사람이서 언어의 형식을 빌어 주고 받는 것이라고 개념규정을 한다면 대화외의 의사소통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적절한 묘사가 필요할 성 싶다.
우리 동아리에서 대화의 단절이란 말이 나오거나 터 놓을 이 아무도 없다는 식의 감정이 지배적이라면 그 물꼬는 누가 터야 할까?
마주 보는 것으로, 또는 귀기울이는 것으로, 그리고 따스한 애정과 이해가 깃들 때 대화는 동면기를 벗어나 싹틔우는 발아의 과정을 서두를 것이다.
박우물의 열일곱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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