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물(둘째형)
또또의 편지
종이인형 꿈틀이
2001. 2. 27. 01:44
군대에서 제일 기다려지는 것이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병들에게 면회는 흔치 않은 것이라서 아마도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큰 낙이 될 것 같네요.
군문의 기간동안 참으로 많은 편지를 열심히 썼습니다.
하루에 평균 2통씩을 제대직전까지 써갔으니 거의 기록수준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특정한 사람에게 1주에 한통씩 기도부탁과 근황들을 소개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주변의 지인 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답장을 받는 것도 언급을 해야겠지요.
계수를 하자면 절반타작이었습니다.
특히나 어른들로 모시는 분들에게는 무슨 소식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니었고 그분들 또한 답장은 거의 없었으니 일단 절반의 결과도 양호했었지요.
이상한 배려 같은 것이 제 속에 작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은 삶의 현장에 있으니 오히려 군에 있는 내가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논리였나요.
어쩌면 그런 생각보다 푸른 옷의 신분을 조금이라도 잊어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편지 쓰기를 일상의 점호처럼 붙잡고 씨름하였습니다.
"선생님. 우리 반 애 중에 군인아저씨랑 펜팔을 원하는 친구가 있거든요. 개한테 편지 쓰라고 말 해볼까요?"
경기도 바닷가에서 군견병 이라는 특수보직 때문에 저는 비교적 드센 조직의 통제에서 비켜 선 군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밤과 낮이 뒤바뀐 근무형태였어도 주일이면 민간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겸, (때로는 반주까지) 학생부 교사로 하루 종일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평소 잘 따르는 학생은 아니었는데 예배 후 지나가는 말로 한 여학생이 말을 건넵니다.
평소 애들에게 즐겨 편지를 써주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본인이 답장을 안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라고 응대를 하였습니다.
그러곤 그 말을 잊어버렸답니다.
"어이. 박상병. 편지 왔어. 박상병은 챙겨주는 사람이 많아서 군대생활 할 만 할 꺼야."
부식차량이 대대를 다녀오면 전령은 편지까지 함께 수령을 해 옵니다.
이제 상병까지 되었으니 전령도 무조건 반말은 안 하고 대우를 해주더군요.
그니가 보내온 편지도 그렇게 배달되었습니다.
이름도 없지만 우체국 소인이 근거리에서 찍힌 것을 보며 나는 누굴까 하는 궁금증으로 편지를 뜯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소속된 민간교회의 학생 중 하나가 보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용기를 내어 편지를 씁니다. 저는 ○○라고 합니다.
-저는 일반 아이들처럼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아서 이런 편지를 쓰는 것도 무척 용기를 필요로 한답니다.
-철이 들기도 전에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것을 먼저 배워왔습니다.
-이곳은 군 부대가 있어서인지 우리 친구들 중에는 소위 펜팔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로 편지만 교환하는 것 뿐 아니라 직접 만나는 학생들도 있더군요.
-아마 저는 누군가를 만나 대화한다는 것이 익숙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설령 기회가 된다해도 편지로 하는 대화이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친구의 말로는 좋으신 분 같아서 망설이다 펜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그니와의 첫 편지는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니를 소개해준 여학생에게 직접 인편으로 편지를 건네주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일반 우표를 붙여서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그니와의 편지왕래는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니가 보내는 편지는 지극히 평범했고 분량 또한 한 장을 채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편지가 오면 답장이나 해주는 정도였고 그쪽에서도 잊을 만 하면 편지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굳이 그쪽에서 처음부터 편지만 주고받자는 전제를 단 것은 아니지만 면회 오라는 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애칭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서 '또또'라고 지어줬습니다.
연상이 맞을 지 모르지만 편지에서 묻어나는 의기소침을 꿋꿋히 이겨내는 오뚝이가 되라는 바램에서 지은 닠네임이었습니다.
저는 군복만 입었다 뿐이지 1주에 한 번은 민간인처럼 교회에서 보냈고 일반 사병에 비해 밖의 사람과 대면을 많이 한편이었다고 봅니다.
우리 학생들도 가끔씩은 부대로 찾아오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푸른 옷을 입고 있다는 자체가 버겁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래도 사람구경을 못 하지는 않았습니다
"또또는 잘 있니?"
가끔 지나는 말로 소개해준 여학생에게 안부나 물어보았죠.
현역 군인으로 애들 졸업식까지 참석할 여유가 있었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요.
그래도 근무시간 한번 어기지 않았고 제 본분은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제대 말년이 되어 한가지 일을 꾸며보았습니다.
틈틈히 써왔던 곡들을 가지고 '십대들의 쪽지 후원기금 마련 듀오 콘서트'를 계획한 것입니다.
군대 기간을 마무리 할 기념비적인 일을 만들어보고자 했고 마침 동일한 시기에 제 지우 문봉이가-(현재 지하철 공연을 같이하는)-육군본부 군악대에서 전역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콘서트 장소는 그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당을 빌렸고 모든 준비는 아쉬운 대로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그때쯤 또 한번의 편지가 그니에게서 왔답니다.
-전역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콘서트도 준비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때는 몰라도 그땐 꼭 참석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용기가 저에게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준비 잘 하시길 빕니다.
제대하면 그 지역을 향해서는 오줌도 눕지 않는다고 하던데 저는 민간복을 입고 1주만에 다시 근무지 읍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군대에 대한 이별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쉬움이 많았지만 그런 대로 무사히 공연을 마쳤습니다.
떠나면 쉽게 예전처럼 찾아오기는 어려울 거라 알고 있었던지 그간 정들었던 녀석들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진짜로 군복을 벗었다는 게 실감나더군요.
"잘 가세요. 열심히 사시구요."
동안 정들었던 녀석들이 인사를 합니다.
"그래, 니들도---"
그러다가 또또를 소개해준 여학생앞에 이르러 무심결에 물어보았습니다.
"참. 그애는 안 왔니? 참석할 것 처럼 편지를 썼던데--"
"아! 선생님 모르셨군요. 그 애 사실은 곱추예요. 오고 싶다고 했는데 쉽지 않았을 걸요."
"-----"
*한 5년이 흘렀을까요.
콘서트 팜프렛의 주소를 기억하고 그니가 편지를 한 번 보냈더군요.
우연히 사물함을 정리하다 여고생때 나누던 편지를 보다 불현 듯 생각이 났다고.
물론 전 답장을 보냈죠.
그리고 그뿐이었답니다.*
-박우물이 퍼 올린 열 다섯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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