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소설

흙이 된 지렁이 1 (2)

종이인형 꿈틀이 2001. 1. 29. 09:31

'시골뜨기의 잠꼬대' 살림꾼 박종인입니다.

닭울녘의 샛별은 초롱하고 동틀녘의 산마루는 경계선이 분명합니다.
오늘밤에 저는 목동처럼 밤도와 꽃을 지켜야 합니다. 6,000개의 빨강, 노랑, 자주색의 프리뮤라를 곁에 두고 돌보는 저는, 양치기가 아닌 꽃지기입니다.

봄이 되니 본관 앞의 매화는 활짝 피었고 명자나무의 눈꼽만한 꽃눈도 선홍빛이 짙어갑니다. 프리뮤라에 꿀벌이 모이듯 우리도 행복을 찾아 날개짓을 합시다.

노란 꿀벌과 함께 봄맞이를 갈까요?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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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이 된 지렁이 1 ***


어슴푸레한 새벽, 안개가 자욱하고 먼동이 트려는지 동편 하늘가에 하얀 기운이 감돈다. 꿈틀이는 잠자는 애벌레를 다시 만났다. 말을 걸고 싶었으나 대답을 안 할 것이니 그냥 지나치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애벌레가 움찔거린다.

'호. 이제야 잠에서 깨나 보다.'
호기심 많은 꿈틀이는 곁에서 그 애벌레를 바라보고 있다. 조금씩 움직이던 애벌레는 흙을 헤치고 나와 상수리나무에 오른다. 어느 정도 높이에 오른 애벌레는 색이 점점 더 옅어지며 머리부분이 갈라지더니 껍데기 안에서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다.

힘겹게 허물을 벗은 그는 젖은 날개를 말리고 있다. 꿈틀이는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가 맑은 소리를 청청 울린다. 그 소리가 고요한 숲에 퍼진다. 그는 한바탕 신나게 노래 부르다가 꿈틀이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듯 말을 걸었다.

"안녕, 넌 내가 긴 잠에서 깨어 처음 만난 친구구나. 난 매미라고 하는데 넌 누구니?"
"........"

꿈틀이는 생각했다. '글쎄, 내가 누구지? 지렁이? 아니야, 난 지렁이가 아냐.'

"넌 누구지?"
다시 매미가 물었다.

"으응, 난......인간이야. 그래, 난 인간이라고 해."
꿈틀이는 꿈속에 들었던 인간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서 지렁이는 살 수 없는 지상의 세계에서 살며, 하늘도 날고 물에서도 헤엄치는 존재라고 꿈결에 들었었다.

"인간?"
매미는 의아한 듯 무엇인가를 다시 물으려 했으나 꿈틀이는 얼른 흙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죽은 것처럼 잠만 자던 애벌레가 껍데기를 벗더니 완벽한 모양으로 탈바꿈을 하는 것을 보니, 전에 애벌레를 하찮게 여겼던 꿈틀이는 몸둘 바를 몰라 그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꿈틀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는 창문'으로 가기로 다짐했다. 잘난 체하는 쥐며느리를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워 내키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쥐며느리는 몸을 둥글게 한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다. 또 명상을 방해한다고 혼날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꿈틀이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 커서 핀잔 맞는 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조심스레 다가가 살짝 건드렸다. 그러나 쥐며느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던 둥근 모양을 한 채 그대로 죽었다.

'왜 죽었을까? 하긴, 밥도 먹지 않고 저 꼴로 있었으니 굶어죽을 수밖에 없지. 이젠 누구한테 물어보지? 엄마 아빠는 어디 있나. 친구라도 만나면 좋으련만….'

꿈틀이는 두더지에게 먹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존재에 대한 회의 때문에 그곳에서 한탄하며 깊은 시름에 빠졌다.

'삶의 희열은 잠깐이고 삶의 고뇌는 계속인가? 흙을 먹는 것이 처음엔 즐거움이었는데 점점 비참하게 여겨지는구나.'

'나는 왜 흙을 먹는가? 나는 왜 흙을 파고 다녀야 하는가? 나는 창조주로부터 천형을 받은 버림받은 존재인가? 나는 왜 몸이 둔하고 손도 없고 다리도 없고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는가! 난 햇빛도 볼 수 없다. 축축하고 깜깜한 흙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운명인가? 나는 퇴화된 동물인가! 도태되어 버린 존재인가! 아니면 나름의 어떤 목적에 의해 원래 이렇게 태어난 것인가?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인가?'

꿈틀이는 태어나기 전 흙으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인간에 대해서, 동물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흙에 대해서. 그러나 그 기억들이 가물가물하고 희미하다. 인간은 위대하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아, 인간이 되고 싶구나!"
꿈틀이는 혼자 중얼거렸다.

"왜 인간이 되고 싶은 거지?"
꿈틀이는 갑작스런 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나는 팽나무야. 흙 속에 사는 이들은 날 '창문'이라고 부르지. 날 통해서 바깥 세상을 바라볼 수 있거든."
"인간에 대해서 잘 아세요?"

"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100년이 지나는 동안 비록 한번도 다른 곳은 가보지 않았지만, 내 잎사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과, 내 몸에 흐르던 물방울과, 내 가지에 둥지를 틀었던 새들과, 많은 곤충들을 통해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산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이 내 그늘에 쉬어가며 한 말들을 기억하고 있어. 난 사냥꾼도 만났고, 농부도 만났고, 교수도 만났고, 어린애도 만났지."

"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요.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어요. 좀 가르쳐 주세요."
"태어나기 전에 흙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을텐데?"

"네,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고 기억도 가물거려요"
"내가 지금 말하더라도 넌 이해하지 못할 부분들이 많다. 네가 직접 경험하며 느낄 때 참 깨달음을 얻게 된단다. 네 스스로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마. 쉬운 것이 아닌데 할 수 있겠니?"

꿈틀이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앎이 더 중요했다.

"네, 그 방법을 알려 주세요."
"땅 속 어딘가에 '슬기곶'이 있어. 그곳을 찾아 떠나렴. 요정이 네 길라잡이가 되어 너를 '슬기곶'으로 이끌어 줄거야."

꿈틀이는 한가닥 불빛을 보는 것같아 힘이 솟았다.
"근데 팽나무님, 저 쥐며느리는 왜 죽었죠?"

"그가 터득한 것은 삶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었어. 몸을 둥글게 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 더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인데,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일찍 죽어버렸구나. 자신이 터득한 한가지 재주에 너무 몰두한 바람에, 그것이 삶의 전부인 양 다른 것을 부정하여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거야. 삶의 가치는 살아있음으로써 인정되는 것이다."

팽나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꿈틀이에게 계속 말했다.

"넌 네 존재가 형편없다고 했어. 그러나 네 모습이 정말 열등한 것일까? 나는 뿌리를 흙에 내리고 줄기는 하늘로 향한다."
"........"

"자, 뿌리와 흙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뿌리는 흙으로부터 수분을 빼앗으려고 하고, 흙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해. 즉 서로 간에 다툼이 있어. 뿌리에겐 흙의 그런 저항은 방해거리이자 역경이지. 그러나 뿌리는 흙에게 원망을 하지 않아. 왜냐하면 흙이 물을 붙잡는 그 저항 때문에 나무는 안정적으로 수분을 얻을 수 있거든."

팽나무는 뿌리털에서 흡수한 물과 기공에서 빨아들인 이산화탄소와 엽록체에서 받은 햇살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만들었다. 그 힘으로 능동적으로 물을 빨아들이며 계속 이야기를 했다.

"흙 입자는 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성인 물분자를 붙잡고 있는데, 이런 전기적인 힘 때문에 오랫동안 가물어도 식물은 물을 안전하게 공급받을 수 있어. 꿈틀아, 식물의 뿌리가 물을 얻기 위해서는 강한 힘으로 물을 빼앗아야 하는 수고가 있지만, 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흙의 그런 저항이 방해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익하다는 것을 알겠니?"
"역경에는 뜻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단다. 안팎의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그 상황을 극복하려 애면글면 애쓰는 가운데 힘이 길러지고 활력이 생겨. 그러므로 네 겉모습의 열등한 부분만 보고서 너의 모든 것을 열등하다고 여기진 마. 못났다고 여기는 너의 형태와 습성들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인간들의 잘난 모습과 발전이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거든. 어떤 상황에서도 다양성을 인정해라. 쥐며느리는 그 다양성을 생각지 못해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요."

"모두가 선생이야. 너와 다른 부분을 인정하는 관용의 자세를 가지고 누군가를 만난다면, 넌 그들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어."
"관용이라고요?"

"박테리아, 곰팡이, 거미, 달팽이, 뱀, 솔개 등은 각각 다른 형태와 습성이 가지고 있어. 비록 너와는 다른 꼴이지만, 이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어. 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을 가질 때, 네 존재에 대한 창조주의 뜻을 알 수 있을 거야."
"창조주의 뜻....."

"꿈틀아, 문제 하나를 낼 테니 풀어보렴. 이 문제를 풀면 네 존재에 대한 뜻을 깨닫는데 도움이 될 거야."
"어떤 문젠데요?"

"자, 식물이 왜 시들까?"
"그야, 물이 부족하여 시드는 게 아닌가요!"

"물론, 물이 부족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더 큰 까닭이 있어. 식물은 단지 물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리 쉽게 시드는 것은 아냐.
".......?"

"이 문제의 답을 얻기 바래."
꿈틀이는 팽나무에게 작별을 고하고 창문을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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