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시

쑥버무리

종이인형 꿈틀이 2001. 1. 10. 12:13


* 쑥 버 무 리 *

하늘은 체
구름을 쳐서
쌀빛 눈을 내린다

하늘 땅 곳곳에
눈과 나무 어우러져
온 누리는 쑥버무리

한 움큼 오므리어
헛헛증 달래었고
향긋한 쑥내음에
봄기운 돋우었지

함박눈이 팡팡
푸짐한 송이마다
푸진 봄이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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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쑥버무리 : 쌀가루와 쑥을 한데 버무려서 시루에 찐 떡.
* 체 :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거르는 데 쓰는 기구.
* 푸지다 : 매우 많아서 넉넉하다.
* 헛헛증 : 몹시 출출하여 자꾸 먹고 싶은 증세. 공복감.




시골뜨기 박종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로운 한해가 열렸습니다.
하늘의 푸른 기운조차 그대로 두고 새하얗게 내리는 눈처럼
지난해의 갖은 일들, 그것이 우리를 무척이나 고달프게 했다손 치더라고
이젠 철지난 옷을 개키듯 고이 접읍시다.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을 지라도 훗날 우린 이런 고백을 할겁니다.
그 모든 것이 내게 필요했구나!
장미꽃의 화려함뿐만 아니라 가시의 아픔까지도.
새옹지마(塞翁之馬)

달팽이에게는 껍데기가, 밤에는 밤송이가, 다운증후군의 아이에게는 47개의 염색체가, 불에 덴 사람에게는 화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는 지독한 안질이 있었습니다.
*******

그제와 그끄제는 감기 때문에 종일 끙끙 앓았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몸뚱이. 그저 누워있어야만 했던 무기력.
어지러이 널브러진 방안에서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한다는 것이 참 허망하더군요.
태풍이 지나가듯 아침이 되었고, 습관적으로 창문을 열었습니다.
내가 잠든 새에 도둑눈이 왔더군요. 눈은 낮에도 내리 내렸습니다.

정말 푸지게 오더군요.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데 창밖에 멀찌감치 눈 덮인 산이 어찌나 곱던지요!
눈에 쌓인 나무를 보며 문득 쑥버무리를 생각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희끗희끗한 쌀가루와 갈매빛의 쑥이 버물어진 쑥버무리가 떠올랐습니다.
보면 볼수록 눈 덮인 산은 쑥버무리 같더군요.
어릴 적에 가끔 어머니가 해 주시던 쑥버무리를 먹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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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내리 잠만 잔 탓인지 잠을 잘 수 없더군요.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아직도 어두컴컴한 아침 6시.
언 길을 따라 학교에 들어서니 전경들이 그 이른 때부터 눈을 치우고 있더군요.
어제도 꼬박 눈을 치웠을 그들. 그들에게 이 눈이 악몽일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군대시절에 눈을 치우는 것은 그저 일상적인 일과일 뿐이죠.
군대시절의 겨울엔 저도 그랬으니까요.

학교를 쭉 둘러보았습니다.
두 손을 오므린 양 야무지고 옹달진 옥향나무가 겹겹의 눈에 깔려 나무에서 떨어진 홍시처럼 묵사발이 되어버렸습니다.
부랴부랴 두 대원을 데리고 눈을 털어내었습니다.
200그루의 옥향나무를 털다보니 등줄기엔 땀이 흐르네요.
참으로 푸진 눈입니다.
이 푸진 눈처럼 올해에도 풍년이 깃들길 바라며 종이인형이 2001년 첫인사 올립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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