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인형 꿈틀이 2002. 10. 14. 13:15

< 황 금 들 >



일주일에 한두 번씩 운동 겸 바람 쐬려 자전거를 타고 마을 어귀 밖으로 나간다.

저수지 둑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논둑 양 옆의 무성한 갈대와 억새의 어울림은 한편의 영화 장면이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모든 농로가 시멘트로 포장됐고

논은 바둑판처럼 경지정리가 잘 되어서 호젓하게 자전거 타기는 안성맞춤이다.

나날이 황금빛으로 변해 가는 들판을 달리면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태풍 루사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이처럼 알알이 여문 벼들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곡간에 쌓일 날을 기다리며 노랗게 물들어 있다.


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길가에 심어진 콩과 호박, 그리고 밭에 심어진 수수와 강냉이도 황금색이다.

모든 농작물이 처음 자랄 때는 푸르지만 곡간에 들어갈 때는 대부분 변화된 색을 띠고 있다.

특히 우리의 주식인 벼와 보리는 세 번 색의 변화를 거친다.

논과 밭에서는 푸른색, 곡간에서는 황금빛, 식탁에서는 하얀색으로 우리의 양식이 되고 있다.

생명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변화(變化)가 일어나지만 생명이 끝나면 변질(變質)이 시작된다.


흔히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있다.

그 이유는 다 자라서 더 이상 높이 올라갈 수 없기에,

그래서 더 이상 감출 수 없기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벼가 자랄 때는 이삭이 잎속에 숨어서 위로 자라지만 다 자라나면 더 이상 잎이 가려주지 못한다.

이삭은 그 동안 빨아들인 양분만큼, 농부가 정성을 쏟은 대로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리고 겸손히 고개를 숙이는 벼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된사람(?)의 모습을 배운다.

가질 만큼 가졌고 오를 만큼 올랐어도 인간의 욕심이 끈임 없어서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면

주인의 원하는 곡간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벌써 몇 군데는 타작을 하여 벼 밑동만 줄줄이 늘어져 있다.

도랑사이로 해오라기가 여유 있게 날아간다.

이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한 동안은 귀한 새였다.

'저 새들은 뭘 잡아먹을까? 우렁이도 개구리도 미꾸라지도 없을 텐데...'


어린 시절에는 수확한 논을 쟁기로 갈아놓고 겨울을 지냈었다.

봄에 따사로운 햇살이 논바닥을 비쳐서 겨우내 동면한 우렁이가 고랑 사이로 나오면

신나게 잡았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그때는 지금의 절반도 수확도 못했지만 그래도 많은 생물들이 함께 더불어 살던 시대였다.

나풀대며 달려드는 얄미운 거머리도 이제는 그립기조차 한다.

조금 덜 수확하고 못 먹어도 같이 살아가는 예전의 논이 그립다.

기회가 되면 그런 농사를 지을 생각이다.

지금은 농사가 잘되어 쌀이 남아도는 현실이지만 사실은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우렁이가 논바닥을 기고 거머리가 너울거리며 헤엄치고 미꾸라지가 방귀뀌는 그런 논,

가을에는 메뚜기도 날뛰고 허수아비가 참새를 쫓는 진정한 황금들이 되살아나는 그 날을 소망한다.


-활뫼지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