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친 글을 세번 써오시요
우리 지하철문화마당 레일아트 하모니카 팀을 담당하는 이숙희 님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다.
막내아들인 형준이는 브레이크댄스를 치는 팀의 일원인 비보이이다.
어머니와 대화를 하다보니 녀석의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면들이 많아 이렇게 몇 자 적어본다.
주로 어렸을 때 이야기이다.(참고로 녀석은 이제 대학 1학년인 스무 살 나이이다)
*하나>
"교장선생님. 우리 반 애 중에 별난 구석이 있는 애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그래요. 어떤 애인데 그러죠.?"
신학기가 되면 모두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어수선한 시기이다. 더구나 초등생 1학년 새내기를 맞아들이는 1학년 담임들은 아직 제도권 교육에 처음 발을 들이는 어린아이들과 씨름하기 분주한 중일텐데 한 선생이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삐식 웃으며 조회말미에 꺼냈다.
"아, 글쎄 제가 숙제를 내주면서 애들한테 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 하는 문장을 몇 개 써오라고 하면서 과제지를 나눠주지 않았겠습니까. 근데 녀석이 정작 써오라는 글은 안 써오고 밑줄 친 글을 세 번 써 오시오, 밑줄 친 글을 세 번 써 오시오 만 써왔지 뭡니까."
모두들 그 이야기를 듣고 교실로 들어가기 전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1학년 새내기들을 접하는 재미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교사도 있었다.
이때 교장선생님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아이 이름이 무어죠?"
"박형준이라고 합니다."
"......"
교장선생님은 이름을 듣는 순간 낯설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 갸우뚱거리다가 바로 자신의 조카 이름임을 확인하고 입을 다물었다.
*둘>
녀석이 5학년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호들갑을 떨며 집으로 들어선 형준이는
"엄마, 엄마. 누가 간첩을 잡아서 1억이 넘게 돈을 벌었대요."
"그래, 너도 간첩 잡으면 그렇게 돼."
"그래요? 그럼 나도 간첩 잡아서 돈 많이 벌 꺼야."
"근데 야아, 그 사람 이름이 뭐라드냐?"
"응. 안씨 성인데 아! 맞다. 안기부라는 사람이어요."
"...."
*셋>
초등학교 맏이인 6학년때 엄마의 눈으로 보면 속상할 일이 하나 있었다. 이제는 제법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상위그룹에 들어왔는데 꼭 2등은 하지만 1등은 번번히 한 아이에게 뺏기는 것이다. 사람욕심이 10등이면 5등을 하고 싶고 2등이면 1등을 하고 싶은 심리라 엄마는 아들을 닦달하였다.
"너는 왜 1등을 할 법 한데 한번도 그 애를 이기지 못하니. 좀만 더 열심히 해보지."
"에이 참 엄마 뭘 걱정하세요. 방법은 간단한데."
"그래. 어떻게?"
"아. 1등짜리가 전학만 가면 해결되는데 뭘그리 신경쓰세요."
"---"
*넷>
이렇게 엉뚱한 형준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취기가 오르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단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저 아들놈에겐 뭐든지 해줄 것이야. 암 다 해줄 것이라고."
굳이 큰아들과 차를 둔 편애가 아니라 아버지와 형준이 사이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학부생활을 하는 형준이는 자신이 한번 움직일 때 5000원 이상은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 밥값으로 더 하라고 하면 그 돈을 놔주고 가는 아이다. 외형적인 것에 투자를 하지 않지만 그가 유일하게 돈을 투자하는 것은 신발이라고 한다. 브레이크 댄스를 하는 학생으로서 공연시 발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하여 운동화만큼은 꼭 메이커를 사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초등학교 1-2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단다. 누가 용돈을 하라고 하면 형은 밖에 나가서 바로 군것질을 하여도 형준이는 그것을 좀체 풀지를 않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업하는 사람들은 부침의 연속이다. 소위 부도라는 것도 심심찮게 경험하는 데 형준이가 2학년때 아버지도 부도위기를 맞았다. 도저히 돈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끙끙대며 집으로 돌아와 한숨만 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왜 그러니, 아직 안자고?"
안방으로 쭈삣쭈삣 들어오는 철부지 막내아들을 보며 부모는 동시에 물었다.
"아빠. 이거."
"그게 뭔데?"
녀석은 곧바로 무언가를 던져주고 안방을 나섰다.
"세상에!"
이어 녀석이 주고 간 것을 펼쳐본 부부는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아빠, 사업에 보태 쓰세요.' 라는 삐툴삐툴한 글씨와 더불어 녀석은 그동안 모아놓았던 자신의 용돈과 세뱃돈 모두를 내놓고 나간 것이었다. 어리지만 아버지가 자금 때문에 버거워 하는 것을 알고 그동안 모아놓았던 모든 용돈을 전한 것인데 10년이 넘은 그때 돈으로 60만원이란 돈을 막내가 놔두고 간 것이라 부부는 그 돈 때문에 한참을 울었다.
"그때 돈 60만원은 600만원, 아니 6000만원보다 훨씬 귀한 것이었지. 놈은 나에게 자금보다 더 큰 희망이란 걸 안겨주었으니까."
아버지는 지금도 어려운 때면 녀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것을 아이에게 투자하고 싶다고 하지만 녀석은 지금 온통 춤에 미쳐서 춤 연습에만 몰두하고 있다.
=지금은 꽤 그 계통에서 유명한 댄스팀으로 활동하고 또 어엿히 심사위원으로도 활동중인 형준이의 모습을 지하철공연에서도 자주 보게될 것 같다.
너무도 드물게 얼굴을 보였네요.
게으름 피우지 않겠습니다.
-지하철문화마당지기 박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