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물(둘째형)

늙어 시골이나 내려간다구요?

종이인형 꿈틀이 2005. 4. 12. 01:23

 

“평생 이 일을 하실 거는 아니죠?”
몇몇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다음 과정을 실례되게 물어볼 때가 많다.
“당연하지, 나이 들면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면서 여생을 맞아야지.”
그분들이야 쉽게 나오는 소망의 한 부분들을 피력하는 것이지만 사실 나이 들어 시골 내려간다는 말을 누구는 농촌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떠나고 아기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인데 또 한사람의 노인을 받아들이는 곳이 농촌이냐는 소리에다, 농사도 젊은 기운으로 연구하면서 힘을 써야 하는 법인데 농업을 무슨 소일거리로 여기냐는 것이 반론의 요지이다.

가끔 방문한 강릉길에 하도 권유를 하여서 어거지로 소리박물관이란 곳에 갔다가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다.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그 규모도 규모지만 소장품의 다양성과 특히 에디슨의 발명품이 오히려 한국의 강릉땅에서 고히 더 간직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박물관은 아니지만 안데스 음악과는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을 것 같아 소개를 받아 방문하였던 일산의 중남미문화원과 그곳 원장님과의 만남은 나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되었다.
아시아를 통털어서도 이러한 규모의 전문 문화원은 전무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생각보다 어느 특정분야에 대한 열정의 작품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일본열도를 흔들었던 ‘겨울연가’ 욘사마 열풍의 배용준과 최지우의 마지막 상봉장면이 나오던 한 섬이 있다. 바로 외도라는 섬인데 그곳은 이미 없어진 프로그램 '성공시대'에서도 다루었던 곳이라 관심을 갖고 보았던 섬이다.
내 아내는 처제와 함께 나를 배제하고 결혼 후 소문에 듣던 그곳을 방문하고 와서 자랑이 대단하였다.

제주도의 목석원은 신혼여행때 방문을 하였다가 운 좋게 그곳 원장과 만남이 이루어져 차를 대접받으며 그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게 된 배경과 정성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후로 따로 제주도 방문을 할 기회도 없어 재차 가보지는 못했지만.

광릉수목원을 가보고 좋다 하니 그 방면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이 ‘아침 고요 수목원’을 천거하며 꼭 그곳에 가보라 한다.
아직까지 삼육대 교수가 만들었다는 '아침 고요 수목원'은 가보지 못했고 방송을 통해서나 간간히 보고 있는 편이다.

위에 열거한 수목원이나 문화원, 박물관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관이 아닌 민간단체가 일을 주도하고 있고, 더 깊숙이 그 속에 들어가면 한 개인의 열정이 수반되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한두해가 아닌 수십년을 준비하고 이미 다른 일을 할 때부터 밑그림을 그리며 차근차근 그속에 아름다운 자연을 집어넣거나 철학이 있는 문화를 집어넣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 들어온 한 벽안의 외국인 제주도에서 평생을 조성하였다는 수목원은 결국은 그 자신 흙속에 들어가는 세월까지 흘러왔지만 누구도 그를 어리석다 하지 않고서 그의 자연사랑에 대한 애정을 기리고 있는 것도 들어봤다.

철도청이 철도공사로 올해 바뀌면서 무슨 의미가 있을 법한 숫자가 자주 보여 질문을 하였다. 2010 이라는 숫자가 무얼 의미하냐 했더니 철도공사(KORAL)이 재정적으로 빚을 떨구고 완전한 자립을 2010년까지 한다는 의미라 답한다.
2005년도 첫 정모때 나도 이런 비슷한 발언을 하였고 재차 여기에서 밝히고 싶다. 앞으로 지금 속도로라면 5년내 지방의 폐교를 레일아트가 인수하여 우리만의 예술 특성화 대안학교를 서서히 시작할 것이고 산골이 되건, 쇠락해가는 자그마한 농촌 마을이건간에 그곳으로 나의 삶터를 옮길 거라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뱀띠로 마흔을 갓 넘긴 나이치곤 너무 빠른 귀향이 아니냐는 소리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지금의 레일아트가 정착이 된 것처럼 이제는 사람을 키우는 일에 열정을 다 쏟고 싶다는 생각이다. 물론 열정만으로 신혼때 6개월여 강원도 산속에서 갑갑하니 앉아 있었던 실수들도 경험이었고, 다 과정으로 여기고 싶다.

시골목회를 10년 넘게 해온 형이나, 중앙직 공무원을 박차고 나가 농촌의 공무원을 스스로 자처한 동생 모두 어쩌면 현재 속한 직장이나 방향은 조금 달라도 궁극적으로는 비슷한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일부러 두 컷의 사진을 집어넣어봤는데 사진에 보이는 교회와 사택을 자연친화적으로 만든다고 5년여를 손수 흙과 돌을 만진 형은 이제 그가 속한 동네 자체를 문화전원 마을로 만들겠다며 향후 10년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동네에 넓은 저수지가 있는데다 산까지 끼고 있는 배산임수 궁산(활뫼)마을이 형의 손을 거쳐 기존의 매화마을, 산수유 마을, 벚꽃 마을처럼 어떤 특색 있는 이름의 문화마을로 변할지 기대된다.

5년안이나 아니면 약간은 더디 갈지 모르지만 폐교나 폐촌에서 새로이 둥지를 트고 특색있는 전원문화마을, 또는 학교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전제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 비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어쩌면 5-6년전에 지하철 공연을 준비하며 사람들에게 동참을 권유하는 것과 똑 같은 모습처럼 내게는 여겨진다. 그때도 그게 되겠냐며 냉소적인 사람들도 분명있었지만 지금은 한달 평균 무려 150-200여 장소에서 동시에 공연이 이루어지는 결과물을 내놓았지 않은가. 아마 이런 추세라면 내년정도면 공연장소와 횟수는 곧 배로 늘어 날 전망이다.

삶터와 일의 현장을 옮기게 되면 어찌어찌 진행하겠다는 생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서 연합할 수 있는 사람들과 최대한 함께하고, 앞에서 온 힘을 쏟아 수목원이나 박물관을 만든 사람들의 노하우를 참조해 소박하지만 레일아트의 색깔과 철학이 녹아난 공간을 만들고 싶다. 어차피 돈으로 레일아트를 시작한 것이 아니기에 자신있게 다음 일도 진행할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아니 대한민국 사회에서 돈이 없어도 정말 음악과 미술, 문화관련 전공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꿈나무 몇몇에게라도 우리는 정말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다.
늙어 시골 농꾼으로 변환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젊은 농꾼으로의 발걸음을 지금부터 서서히 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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