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_방하은
<오발탄> 이범선
이번에 읽은 책은 이범선 작가의 <오발탄> 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길지 않는 구성의 단편소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7월의 독서감상문 책으로 선택한 이유는 한국 소설에 도통 호감이 가지 않던 나에게 처음으로 '한국 소설도 이럴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짧은 단편소설 모음집에서 처음 만났다. 그 책에 <A사감과 러브레터>와 같은 다양하고 유명한 작품들이 있었음에도 내가 이 소설의 제목과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오발탄'이라는 제목과 주인공 철호의 인생, 그리고 철호가 마지막 장면의 택시 속에서 읊조리는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소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일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한다.'라는 독백이 너무도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지금, 중3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철호의 상황, 그리고 철호가 책임 져야할 것 같은 주변 인물들의 상황, 또 철호를 통해 투영되는 당시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의 상황을 비극적인 아야기로 담아내면서, <오발탄>이라는 딱 맞아 떨어지는 제목을 붙였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다만 달라진 것은 중1때는 이러한 상황의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다 정도로 느꼈다면, 이제는 좀 더 넓어진 당시 상황에 대한 배경 지식과 문장 하나 하나의 단어에 집중하게 되다보니 더 깊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게 된 것중 하나가 바로 영호의 대사이다. '양심이란 가시요. 베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는 거요'. 소설에서 주인공 철호와 동생 영호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짐으로서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철호는 가난할지라도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견인 반면, 영호는 위의 대사처럼 그깟 양심, 법률, 관습 따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어머니가 그렇게 되기 전에(남북 분단으로 인해 정신 장애) 더 빨리 버렸어야, 마음을 비틀어버렸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영호의 주장에 많은 느낌을 받았던 이유는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호는 총기 강도 짓을 벌이다 결국 수감되고 만다. 인질로 잡은 이를 차마 쏘지 못하고 그저 어설프게 도망쳤기 때문이다. 영호는 철호에게 그러면서 말한다. 인정선을 넘지 못했다고, 법률선은 넘었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영호 내면의 선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장면이 너무 슬펐다. 자신이 꼭 그 윤리, 도덕, 관습 다 버리고 마음을 비틀어 잘 살고 말 것이다. 라고 외치던 영호는 착했다. 그 착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그랬을 거다. 너무나도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넘쳐났을 것이고, 영호가 말한것처럼 그 옳은 것들을 다 버리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가난한 사람들의 심경을 짓눌렀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비틀어 짜 내야했던 영호의 모습에, 또 그 모습에 투영되는 사람들의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윤리, 도덕, 관습.. 그 바른 것들을 다 저버리는 것이 분명 옳지 않은 일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호를 보는 철호의 마음은 어땠을까. 영호가 이러한 시궁창 같은 상황을 초현실적으로 박살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철호는 묵묵히 얹어내는 사람이다. 철호에게는 너무나도 진 짐이 많아서, 영호와 같은 짓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철호에겐 영호의 이런 노력조차도 달갑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철호에겐 짐이었기 때문이다. 철호는 영호가 총기 강도로 경찰서에 잡혀있을 때도, 아내가 출산 중 병원에서 죽게되었을 때도 묵묵했다. 묵묵해야만이 갑자기 던져진 것만 같은 그 무거운 바위 두개를 견뎌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차하는 순간 그동안 묶어서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이 짐같은 모든 순간들이 다 스러져버릴 것이었이 때문이다.
그러나 철호에게도 이는 너무 버거웠다. 철호는 양공주 일을 하는 동생 명숙이가 아내 병원비 하라고 준 백환을, 이제 아내가 죽어버려 사용 할 곳이 없는 그 백 환을, (철호 나름) 막 쓰기 시작한다. 즉,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호는 치과에 가서 앓던 이를 다 뽑아버렸다. 그동안은 돈이 없어 계속 묵혀뒀던 그 이들을 말이다. 또 철호는 가게에 들어가서 설렁탕을 시켰다. 그동안은 돈도 없어 보리차로 배를 때웠는데 말이다. 철호는 택시를 탄다. 그동안 돈이 없어 항상 먼 거리도 걸어다녔었는데 말이다. 철호는 지금까지 져 오던 그 짐들을 다 떨쳐버렸다.
하지만 그게 과연 자유일까? 철호가 자신이 져야한다고 생각했던 그 수많은 짐들을 다 모르는 척 하는 지금이 과연 철호에게 자유일까? 난 이게 포기라고 생각한다. 철호는 포기한 것이다. 이제 어떻게 되든, 그저.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은 철호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나는 철호의 죽음이, 왠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물론 철호의 딸과 어머니를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지만, 철호 그 자신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철호는 자신이 오발탄인가, 하고 생각한다. 가긴 가야하나,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알지 못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에 같이 살아가던 우리나라의 그 모든 빈곤했던 사람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그럴 것이다.
이 책이 내게 감명깊게 다가왔던 건,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오발탄>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