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땅콩으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 조지 카버.
땅콩으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 조지 카버.
사실 이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흑인 지도자를 워낙 정치상에서 유명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나 말콤 엑스등으로나 인지하고 있어서.
꼽혀진 책중에서 우연히 골랐는데 단숨에 읽어내려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연구와 동포애, 신과 인간과 자연에게 헌신한 기록이다.
추천할만한 인물이고 양서이다.
쉽게 읽히도록 구성되어있다.
박우물------------>

책소개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편견, 어려움을 극복하고 '위대한 미국인', '위대한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오른 조지 워싱턴 카버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청소년, 젊은이들에게 "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조지 카버는 가난과 무지로 고생하는 남부 흑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목화를 대체할 작물을 연구하다 땅콩, 고구마, 콩 등 남부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물들을 이용해서 수백 가지의 제품을 개발해 남북전쟁 후 미국의 경제를 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목차
1. 행복한 고아
2. 처음 본 흑인 학교
3. 학교에 다닐 수 있다면
4. 두드리면 열린다
5. 떠돌이 생활
6. 농사에 대해 배우다
7. 대학교 문턱에서의 좌절
8. 미래로 가는 문을 열어라
9. 대학생이 되다
10. 아이오와의 명물
11. 터스키기 농과 교수
12. 남부를 변화시켜라
13. 목화밭에서 땅콩밭으로
14.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15. 차별 없는 세상을 물려 주 자
16. 위대한 미국인, 위대한 발명가
참고문헌1
참고문헌2
출판사 서평
● 출판사 리뷰
1.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고아
"왜 흑인들은 배우면 안 되나요?"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는 사고로 죽고 어머니와 누나는 남북전쟁 직후 노예 약탈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그후 생사를 알지 못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주인 모세 카버 부부의 보살핌으로 형과 함께 농장에서 자랐다. 농장 주인의 성을 따라 이름을 조지 카버라고 지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여자들이 하는 집안일을 거들었는데 뜨게질, 요리, 정원 가꾸기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손에만 들어가면 죽어가던 나무와 꽃도 살아나고 못쓰게 된 것들도 새 것이 되어서 ' 만물 박사', '식물박사'라고 불렸다.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아 그의 머리 속에는 '왜?'라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궁금한 것들을 가르쳐 주는 책을 읽고 싶어서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남북전쟁 후 흑인들이 해방은 되었지만 배움의 기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꽃들도 색깔이 다 다르지만 어느 꽃이 낫다고 말하지 않고, 태양은 흰 꽃 검은 꽃 구별하지 않고 골고루 햇볕을 받게 해 주는데 사람은 왜 학교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배움에 대한 갈증을 포기할 수 없어 흑인을 받아 주는 학교로 가기 위해 태어나서 한번도 떠난 적이 없었던 농장을 떠났다. 11살이었다. 이때부터 미국 중서부 지방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닥치는 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7살에 미국의 명문 농과대학인 아이오와 농과대학 최초의 흑인 학생이 되었다.
2. 남부의 가난한 농부들에게 희망을
"무지와 가난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저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남북전쟁이 끝난 후 흑인들은 법적으로는 자유인이었지만 실상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백인들이 소작농이라는 이름으로 흑인들을 비공식적으로 노예화했기 때문이다. 100년 이상 목화 농사만 지어온 남부 지역의 땅은 이제 더 이상 목화 농사로는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지만 무지한 흑인들은 목화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줄 몰랐다.
무지와 가난의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는 동족이 처한 현실을 눈으로 보며 조지 카버는 목화를 대체할 작물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비싸고 좋은 기구들이 있어야 실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해."
조지 카버는 학생들과 함께 쓰레기장으로 가서 페품을 모아 실험에 필요한 도구들을 직접 만들었고 그의 손에 들어가면 아무리 쓸모 없는 물건이라도 새로운 용도를 가지고 태어났다.
3. 겸손과 검소한 생활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위대한 과학자
"돈을 많이 모아서 가난한 흑인들을 돕는 일에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권유하면 조지는 "내가 돈을 많이 소유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겨서 내 동족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죠"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조지는 터스키기 학원에 처음 부임했을 때 받았던 125달러의 월급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6년 동안 그대로 유지했다. 학교에서 월급을 올려주겠다는 것도 사양했다. 월급을 받으면 책갈피 속에 넣어 두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는 돈은 차곡차곡 모아서 학교 건물이나 시설에 기부금으로 내곤 했다.
죽기 직전에는 평생을 양복 한 벌에 자기 소유의 집 한 채 없이 학교 실험실에서 생활하면서 모은 6만 달러를 학교에 내놓았고 학교는 이 돈을 씨앗으로 조지 워싱턴 카버 재단을 설립해서 농학 분야에 우수한 인재들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조지 카버가 땅콩에서 만들어 낸 식품과 제품은 수도 없었다. 마가린, 버터, 비누, 식용 기름, 물감, 구두약, 잉크, 연고, 크림, 접착제, 전기 절연판, 인조 대리석, 플라스틱, 인조 고무, 밀가루, 페인트 등 수많은 제품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1923년에는 과학계에 공헌한 공로로 스프링간 훈장을, 1942년에는 남부의 농업 경제에 기여한 공으로 루스벨트 메달을 받았으며, 1947년에는 그가 태어난 다이아몬드 그로브의 모세 카버 농장에 기념관이 세워졌고, 1951년에는 미국의 50센트 주화에 그의 모습이 새겨졌으며, 1977년에는 위대한 미국인 명예의 전당에, 1990년에는 위대한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도 가입했다.
동족을 무지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어야겠다는 작은 사랑에서 시작된 조지의 발명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 전체를 부요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조지는 흑인들의 인권을 외친 적이 없지만 그로 인하여 흑인들의 인권은 신장되었으며 역대 그 어느 인권주의자들에 못지 않은 역할을 했다.
책속으로
하이랜드 칼리지
8월 말,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조지는 지금까지 자신을 도와 주고 기도해 준 분들에게 자신의 성공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체크무늬 양복도 한 벌 사서 멋지게 차려 입고 한 손에는 타자기를 들고 고향으로 향했다.
올데이스에 가서 루시 아줌마와 벤 아저씨를 만나고, 포트 스콧에도 들러서 페인씨 부부에게도 인사를 드린 뒤 네오쇼, 다이아몬드 그로브에도 들렀다. 마리아 왓킨스씨 부부와 모세 아저씨와 수잔 아줌마, 다들 친부모처럼 조지를 반겨 주었다.
모세 아저씨와 수잔 아줌마는 이제 나이가 들어 많이 약해 보였다. 조지는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자세히 들려 주었다.
"조지, 공부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니?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
수잔 아줌마는 조지를 다시 떠나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에요, 아줌마. 아직 멀었어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헤어지기 서운해하는 모세 아저씨와 수잔 아줌마 곁에서 며칠을 보낸 뒤 돌아오는 길에 조지는 세네카에 들러 형 짐의 무덤을 찾았다. 모세 아저씨가 세워 놓은 묘비에는 형 조지가 "1859년 10월 10일생" 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세 아저씨는 형이 태어난 날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네. 나는 왜 모세 아저씨한테 내가 태어난 날을 물어 보지 않았지?"
아쉬움이 있었지만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입학 취소
고향도 방문하고, 보고 싶은 분들도 만나고, 형의 무덤까지 보고 난 뒤 조지는 부푼 마음으로 하이랜드행 기차를 탔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조지는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즐겼다. 하이랜드는 미주리 강을 따라 캔사스 북동부 끄트머리에 있었다.
떡갈나무와 호두나무가 울창한 하이랜드는 어린 시절 놀았던 미주리 숲을 생각나게 했다. 학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길가에는 분홍색 라벤더 꽃들이 조지의 눈을 사로잡았다. 라벤더는 평지 식물로 이런 삼림 지대에서는 보기 드문 꽃이었다.
"행복한 날들이 될 것 같군."
조지는 식물의 표본을 수집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9월 20일, 조지는 하이랜드 칼리지의 학장 앞에 섰다.
"조지 카버라고 합니다! 오늘 입학식에 참석하라는 통지서를 받고 왔습니다."
"흑인이었어요?"
학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미안합니다. 우리 학교는 흑인 학생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허가서를 보내셨지.."
"학생은 입학 지원서에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소. 그러니 입학 허가는 취소요."
조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흑인은 받지 않는다"는 말이 귓가에 윙윙거리며 현기증이 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하나님, 흑인은 대학에 갈 수 없습니까? 이제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 곳으로 가겠다고 결심하고 포트 스콧을 떠나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 흑인이라는 딱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뗄 수가 없는 것인가? 온몸의 힘이 쫙 빠졌다.
태어나서 이렇게 낙심해 보기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