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국경을 넘으며
-둘째 박종호의 남미얘기-
보름전에도 잠시 볼리비아 국경을 조카 학교문제로 넘었지만 이번에는 내 개인적인 일로 작심을 하고 출발하였다.
국경까지 9시간정도 달려 새벽 5시정도 도착하였다가 난방이 전혀 안된 버스 안에서 세계에서 배가 다니는 규모의 호수로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티티카카(해발 3855미터: 아마 띠띠까까가 더 정확한 발음일 수도)호수옆이라서 벌벌 떨었던 기억에 이번에는 만반의 난방 준비를
하고서였다.
이곳 국경마을을 넘어 본 사람들은 경험하였겠지만 데사구아데로 국경의 공무원들은 매사가 돈과 결부되어 있다.
저번에 한달짜리 비자를 받았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는 내 생각은 이번에도 보기좋게 빗나갔다.
남미 나라중 거의 유일하게 한국에게
비자를 요구하는 나라인 볼리비아는 국경도시에서 항상 말썽이 된다.
이번거는 이번거고 저번거는 저번거라는 답변과 다시 뒤돌아서 다른
푸노에서 비자를 받아오라는 제스쳐에 화도 나고 또 일정에 차질이 생기자 같이 있던 페루비안 친구가 비자비와 약간의 공돈을 얹혀서(급행료) 해결을
하였다.
돈이 없는 나라니 비자장사라도 하여야겠지만 개인적으로 보아서는 비자외에 요구되는 것들은 결국 개인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누구의 표현처럼 외국인에게 입국세라는 보이지 않는 형태의 것을 요구하는데 안줄 수 가 없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볼리비아뿐만이 아니라 이곳의 페루 국경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처음 국경을 넘을 때는-몰라서 당한 부분도 있지만-당일치기 일을 보고 오니
하룻밤을 자고 가야 한다고 도장을 안찍어준다. 계속 버티니 상급자가 보고 그냥 보내주라고 해서 나갔는데 이번에는 다른 방의 경비 같은 이가
와서는 왜 그냥 가냐며 되려 화를 낸다.
금전을 지불하지 않고 통과할 수가 없다는 투이지만 이미 사무실은 나섰고 우리는 다리를 넘어
페루쪽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무슨 서류가 없다며 5달러를 가져갔던 페루 공무원은 당일치기로 들어오자 역시 도장을 안찍어준다. 한번
들어오면 90일짜리 연장 도장을 찍어주는데 노골적으로 돈 이라는 명칭만 열거하지 않았지 비자 어쩌면서 물고 늘어졌다.
우리도 이에 질세라
한국과 페루와는 비자면제 협정국인데 무슨 문제냐며 버티자 퇴근시간이 다 되었는지 할 수 없이 도장을 찍어주어서 통과가 되었던 불쾌하였던 첫
나들이.
그래서 2번째는 나름대로 준비를 하여 페루에서 문제가 안되었다.
볼리비아 군인들은 저번에 몸수색을 하더니 이번에는
쳐다보지도 않아 그냥 들어갔는데 역시 비자비와 급행료까지 주고 볼리비아 출입국 통과하였다.
앙헬은(그 날이 생일)자국민들 줄이 너무
길어서 역시 페루 이민국에 급행료를 2중으로 주고 나와 시간을 맞추었는데 비행기값을 아낀다고 국경을 넘을 때 마다 실랑이를 하는 것이 솔직히 영
마뜩찮다.
물론 기차나 버스가 밖의 풍경을 보기에는 좋은 이유도 있어서 육로를 선택했지만 남미 대부분의 나라는 지금 기차가 죄다
사양산업이라 있는 노선도 폐지중인데가 많단다.
5명이서 합승택시를 타고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볼리비아 수도에 들어서는데 기사가
협정한 것과 달리 엉뚱한 요금을 요구하자 일제히 손님들이 들고 일어나 내리는 순간에까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콜롬비아 사람은 먼저
비행기탄다고 공항으로 가고 마침 볼리비아 제3의 수도인 악기의 도시 코차밤바에서 수학중인 여대생 페루비안 꼬랄(약학과)이 우리와 동행을 하였다.
6시간이면 도착한다던 목적지는 8시간을 넘겨 한밤중에 도착하였다.
운전수 마음이니 중간에 자기 일을 다 보고 간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시스템을 기대해서는 안되는 줄 알지만 휴게소 개념도 다르고 화장실이 없는 버스는 주간에 정차할 때 알아서 해결
하거나-밤중에 쿠스코에 가다가 화장실 없는 버스를 탔다가 오밤중 노상방뇨라는 경험도 했다-장시간 참으면 된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정도면
영어가 최소한 통할텐데 이곳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꼬랄은 이것저것 앙헬을 통해서 물어보더니 나중에 기회되면 한국어를
한번 접하고 싶댄다.
그나저나 밤중에 떨어졌으니 숙소가 급하다. 자신의 본거지인 만큼 꼬랄이 안내를 해주어서 시설은 최고지만 값은
상상외로 싼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우리는 조촐한 앙헬의 생일잔치를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열었다.
곧바로 내일부터 시험이라는 꼬랄을 더
붙잡을 수 없고 피곤도 하여 바로 숙소로 들어왔다.
여기에 온 것은 악기의 도시인 코차밤바에서 좋은 악기 루트를 만들기 위해서인데
악기시장은 제대로 찾았지만 영 소리가 아니거나 좋은 것은 가격이 예상보다 비싸 다른 곳이 없나 하였더니 질 좋은 악기를 팔던 아주머니가
볼리비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35년 전통의 하르까시 전 멤버이면서 악기제작자가 친척중에 있다며 소개를 해준다.
택시를 타고 달리니 요즘
이곳의 명물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상과 가까운 마을에서 살고 있다.
공방을 구경도 하고 직접 소리를 들어보니 같은 음악인의 입장에서 들어도
손색이 없는 소리들이 각각의 악기에서 나오자 앙헬은 손을 치켜든다. 대만족의 표시이다.
그나저나 악기가격을 물어보자 일본에 수출하는
단가라며 보여주는 거래명세서를 보니 엄두가 안난다. 소리야 최상이지만 일본 돈에 비하면 한국의 돈 가치는 지금의 페루와 볼리비아정도 차이가
있으니 어쩌랴.
일일히 견적을 적고 그가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현 볼리비아 버금 그룹
의 시디를 선물받았다.
국경에서의 안 좋은 기억은 이곳 코차밤바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도시를 들어오고 나서면서 유쾌함으로 기상이 바뀌었다.
200년전 스타일이라는 악기제작가의 마을은 기와지붕이 있고 마을 중심에는 동양식 정자도 보인다. 도시 근교에서는 슬레트 지붕과 양철까지
보이니 시골생활을 경험 한 나로서는 정겨움이 자연 묻어난다.
하긴 시내곳곳에서도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동양식 기와들이 보여 정말 볼리비아가
경제적으로 그렇게 문제가 되는 곳인가 하는 질문이 이 도시에 와서 생겼다.
무엇보다 라파스와 달리 이곳은 녹색이 훨씬 더 묻어나서 눈이
피곤하지 않고 우리 한국의 지방도시를 보는 것 같아서 더 유쾌해졌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살면서 도시에 물른 탓인지 남미에 와서도
수도보다는 지방도시, 그 것도 녹색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도시를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지방을
내려갈 때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을 청하는 것이 다반사지만 이곳에서는 어쩌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길이기에 바깥 풍경을 담느라
잠을 잘 수가 없다는 설명에 두 페루비안들은 고개를 끄덕였던 것 처럼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거의 쉼 없이 버스에서만 움직이던 일정은 나중에
몸에 적신호를 보냈다.
어쨌거나 일을 보았으니 바로 라파스로 복귀하자고 하여 버스를 타고 돌아오니 역시 또 한밤중.
터미널 근처
싸구려 숙소에서 잠을 청하는데 저녁은 역시 춥다.
아침에 바로 출발하는데 터미널에서 자녀들과 여행을 하는 일본인 여자를 만나 말을
건네니 유창한 영어와 스페인어로 응대를 한다. 미국인과 결혼을 하였는데 남편이 이곳 볼리비아에서 현지 출장중이라 자신은 3개국어를 하지만
아이들은 영어와 일본어만 한다고 말한다.
페루에 여행을 가는 중이라고 하였는데 같은 동양인이지만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호들갑이 표가
난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수도이지만 노상방뇨로 인한 냄새뿐 아니라 견분이 아닌 사람 인분들이 길가에서 쉽게 포착된다. 화장실비를
내기보다는 저녁에는 그냥 길거리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 흔적들이 보인다.
라파스는 밑으로 내려갈 수록 부자들이 살고
도시의 위에는 빈민촌들이 계속적으로 거대하게 형성되가고 있다고 한다.
예전의 우리 달동네는 그나마 양반에 속한다.
도시 외곽을
벗어나면서 애들 소꿉장난처럼 만들어진 흙집들을 보면서 저런 집에서 살수 있냔 질문에 나는 가능하지, 다만 티브이와 인터넷이 있으면 하고 웃었지만
정말 사람이 살 까 싶은 집들이 많다.
데사구아데로 국경에서 잦은 말썽때문에 이번에는 장시간 더 돌아가지만 호수를 끼고 드라이브
하는 기분도 들고 중간에 호수를 건너는 코파카바나 행 융구아 국경마을을 선택하였다.
녹색이 거의 드문 이곳에서 호수를 감상하는 것이
그나마 운치가 있는 길이었다. 물론 한참 돌아간다.
고산들의 계곡을 넘으면서 중간에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놓으면 이보다 절반은 시간이
절약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나 기술력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채 500여 미터 정도의 강을
일일히 사람따로 버스는 버스대로 웬지 위태하게 보이는 채 배에 태우며 도강하는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환경론자에 더 가까운
나지만 이곳은 한국과 다르다. 동식물의 유동이 필요하거나 수목이 있어서 생태보호라는 차원보다는 사실 산들은 묶어버리면 충분히 시간 단축이
가능할텐데 평이한 강의 다리하나 놓기 어려운 실정인데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다.
강을 넘으니 군인이 검문을 하는데
무어라고 말을 하니 앙헬이 어이없어 한다. 혼잣말로 여권에 문제가 있다는 투였는데 문제는 무슨 문제.
괜히 티 내는 것이다.
코바카바나 마을은 호수외에는 볼 것이 없는데 관광버스행렬이 길게 늘어서있다.
현지시간으로 내일이 볼리비아의 날이기도 하지만
이곳 코바카바나 마을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는 축제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는 설명이다.
거기에서 합류한 서양인들(미국,
독일, 프랑스인들)과 같이 융구요 마을에서 출입도장을 찍는데 역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곳의 공무원들은 군소리도 없고 공적인 업무만 한다.
참 볼리비아는 죄다 일본 차량들인데 이곳은 국경이어서 그런지 티코 탣택시들이 부지런히 국경을 넘고 있다.
국경이래봤자 버스 한대가
들어 갈 정도의 문을 통과하면 되는데 버스는 옆의 다른 통로로 움직이고 일반인들은 그도저도 필요없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환전업무부터 음료수나
기념품들을 길게 늘어서서 팔고 있다.
푸노에 도착해서 이제 복귀하려는 다른 3번째의 버스로 갈아타는데 싼 티켓이라면서 제일 뒷
좌석에 배정한다.
이때 다수의 멕시칸들이 버스를 점유하였는데 이들과 가면서 6시간 내내 지치지 않는 소란때문에 어둑해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니 정말 잠을 못 잔 이유는 며칠간의 일정중 잠부족과 아마 식중독과 고산증세의 휴유증이었는지 갑자기 복통과 고열이 계속
발동하여서였다. 버스에서 창문을 열고 토할려고 해도 안되고 창문에 손을 대어 식힌 후 다시 배에 갔다 대는 등으로 냉찜질을 계속 하면서 가자
고열은 어느정도 가라앉았지만 복통은 집에 도착해서까지 멈추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좁은 좌석도 문제지만 정원외에 항상 장거리
버스에도 손님을 채워가는 관행때문에 화장실까지 가는 통로도 만만찮았다. 독서조명조차 아예 없고 화장실 조명도 없는 판인데 변기에 앉는 것 까지
찜찜할 정도다.
원인이 다른 데 있으니 아무리 화장실에서 앉아 있어보았자 해결될 리 없다.
다행히 1시간 정도 앞서 도착을 하여
집에서 쉴 수 있었지만 휴유증은 약 이틀정도 갔었다.
장거리 버스를 혼자서 타고 움직인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문제가 될 소지가 많은
것 같아 덜컥 겁이 나기도 하였지만 다행히 옆 동료가 있었고 무사히 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볼리비아행은 몸에 여러가지 무리가 있었던
원행이었다.
-박우물-
태극기 휘날리며 (0) | 2006.09.10 |
---|---|
행진, 행진 하는 거야 (0) | 2006.09.04 |
[스크랩] 현악기가 보편화된 나라 (0) | 2006.07.27 |
[스크랩] 티코의 도시 페루 아레끼빠 (0) | 2006.07.10 |
2006 레일아트 창작가요제 막을 내렸습니다. (0) | 2006.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