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같이 우는 새

시골뜨기 브런치

by 종이인형 꿈틀이 2022. 10. 17. 08:51

본문

신둔면사무소 뒤 풍전주택 담장 가에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 나뭇가지에서 꽹과리 치듯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에 치어다보니 물까치 무리가 앉아있다. 걔 중 한 마리가 상쇠인 듯 우니 곁의 무리들이 일제히 따라 운다. 동네 개가 짖으니 건넛마을 개도 짖듯이 돌팔매질 거리만큼 떨어진 다른 나무에서도 물까치 떼가 떽떽거린다. 어설픈 풍물꾼들이 난장판을 벌인 듯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새가 우는 까닭 중에는 위험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동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먼저 우는 새는 위험하다. ‘우는 꿩이 먼저 채운다’라는 속담이 있다. 꿩이 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모를 것을, 소리 내어 울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어 그만 매에 채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맨 처음 운 물까치는 왜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먼저 울었을까? 위험을 보고서 혼자만 피하면 더 안전할 텐데 큰소리로 울었다. 

 

매와 같은 코로나19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주변의 반응은 긴가민가하다가 차츰 따라서 소리를 질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 위험에 대해 처음 경고하며 대책을 호소하던 중국 의사 리원량은 이 병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결국 자신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했다. 

 

그는 왜 울었을까? 그가 이 병의 위험을 알고 조용히 그 자리를 떴다면, 그는 어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자리에서 처음 울었고, 계속 울었고, 결국 꿩이 매에게 채이듯 바이러스에 채였다. 

 

물까지가 또 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까치도 거의 동시에 운다. 그리고 그 옆 나무의 물까치도 운다. 나무의 모든 새가 함께 운다. 그 물까치는 그냥 운 것은 아닐 것이다. 울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 까닭이 내겐 보이지 않는다. 까닭이 원래 없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울음으로써 까닭이 물러났을 것이다. 새들은 같이 울었다. 

 

울음은 종이방패다. 

어떤 것을 찌를 수도 없고, 어떤 것에 찔리면 쉽게 찢어지는 허름한 종이방패. 약한 자는 이 파리한 종이방패로 자신을 보호한다. 약자는 울음으로나마 공격 아닌 공격을 하며 자신을 보호한다. 힘센 자는 울지 않는다. 아니 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힘없는 자는 운다. 우는 것은 나약한 자의 모습. 나약한 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저항이다. 몸부림이다. 이때, 혼자만 운다면 얼마나 슬플까? 

 

혼자 우는 것은 혼자 비 맞는 것보다 더 처량하다. 

이는 울게 한 그 슬픔에다가 외로움의 처량함이 더해져서 세찬 비바람에 차가운 눈보라까지 맞는 꼴이다. 이때 누군가가 곁에서 같이 울어준다면, 슬픔은 비록 가시지 않더라도 처량함은 덜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옆에서 같이 울어주는 친구 덕에 점차 그 슬픔마저 가실 것이다. 곁에서 같이 울어주는 것은 슬픔을 같이 나누겠다는 뜻이기에 슬픔은 반으로 줄어든다. 조각난 얼음이 더 빨리 녹듯 나눠진 슬픔도 더 빨리 스러진다. 

 

같이 웃는 것도 위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이 울어주는 것만큼은 아니다. 같이 웃는 것은 기쁨을 같이 나눈다는 것이다. 손해날 것 없다. 물론 자기가 웃는 데 같이 웃어주지 않으면 서운할 것이다. 자기의 기분에 공감하지 않기에 한편으론 서운하고 외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운할 뿐 아픈 것은 아니다. 우는 것은 아픈 것이다. 같이 우는 것은 상대의 아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이 웃는 것보다 같이 우는 것이 훨씬 큰 위로가 된다. 

 


윤정이는 아주 친한 고등학교 친구 둘이 있다. 하나는 가까이에 이천에 살고, 하나는 멀리 서울에 산다. 지난달에 윤정이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윤정이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나를 보자 놀란 윤정이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안아주며 등을 토닥거리니 흐느끼며 울었다. 한참을 그냥 울게 두었다. 생각지 못한 나의 방문에 반갑고 고맙고 슬프고 위로되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윤정이는 친한 두 친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멀리 사는 친구는 연락하면 만사 제쳐두고 올 친구이기에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지금 개인 사정으로 경황이 없는데, 자기가 연락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올 것 같아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는 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내 딴에는 그 친구는 가까이에 있으니 잠깐이라도 들를 수 있어 연락하기에도 부담 덜할 것 같았다. 윤정이가 말하길, 그 친구도 친하기는 하지만 힘든 상황을 얘기하면 자기도 힘들어하며 부담을 같은다는 것이다.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그 친구에게는 힘든 상황을 말하기는 꺼려진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친구와는 좋은 일이 있을 때만 만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다는 거다.

 

멀리 사는 친구는 같이 웃어주고 같이 울어주기에 마음 거리가 가깝지만, 가까이에 사는 친구는 같이 웃어주기는 하지만 같이 울어주지 않기에 마음 거리가 멀다는 거다. 윤정이는 친한 두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에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가 사뭇 다르기에 진정한 친구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되었다.

 

같이 웃고 우는 게 친구인데, 같이 우는 이가 더 친한 친구다.
반응형

'시골뜨기 브런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젊은 아바타  (0) 2022.10.17
차라리 까마귀가 그립다  (0) 2022.10.17
여기엔 학생 묘가 왜 이리 많아요?  (0) 2022.10.17
자동차가 사람보다 빠를 까닭은?  (0) 2022.10.17
난 선무당이었다  (0) 2022.10.17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