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잎이 무성한 논, 생생한 초록불결이 그지없이 평온하다.
벼잎 무리의 부드러운 군무에 눈길이 춤을 춘다.
초록은 평안함이다. 피곤한 눈도 초록을 보노라면 안정되고 차분해진다. 논논이 이어진 초록바다가 지평선을 이뤘으면, 그 빛깔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인다.
하지만 초록은 신호등처럼 주황으로 변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아 말라죽었다.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잎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보다는 열매를 위한 과정이다. 언제까지나 푸른 잎으로만 자태를 뽐낼 수는 없다. 열매를 위한 양분을 충분히 흡수하면 이제 이삭을 내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천에서 자라는 벼 중에 일부는 조생종이라서 일찍 모내기를 하여 추석 전에 수확하고, 대부분의 벼는 중만생종이라서 추석 후에 수확한다.
조생종은 7월 말부터 이삭이 패기 시작하지만 중만생종인 추청은 광복절이 지나야 출수기이다. 그래서 팔월의 논은 이삭이 팬 희끄무레한 논과 초록의 논이 공존하는 풍경이다.
벼 잎 속에 이삭이 있다. 얼마나 자랐을까? 유수(어린 이삭)의 크기로 이삭 패는 날(출수기)를 가늠할 수가 있다. 출수기에 맞춰서 이삭거름을 주는 날을 가늠한다. 잎이 무성할 무렵 잎을 까서 이삭을 살핀다. 유수가 어느 정도 크면 겉에서도 알 수 있다. 잎 중간이 통통해지며 배가 부르면 해산(?)할 날이 가까운 것이다. 이삭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면 논은 초록빛을 바래간다.
벼꽃을 보고 싶다!
벼도 꽃이 피나? 이렇게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벼도 식물이므로 꽃이 핀다. 단지 화려한 꽃잎이 없을 뿐 열매가 맺힐 수 있는 암술과 수술이 있는 꽃이 핀다.
벼꽃은 자신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 생김새가 두드러지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꽃이 세상에 선뵈는 시간도 잠깐이다.
벼꽃을 제대로 보려면 아침에 나서야 한다. 어느 꽃처럼 며칠 동안 혹은 하루 종일 꽃을 피우고 있지 않는다. 불과 1시간 가량만 꽃을 피고 지는 벼, 우리가 보는 것은 꽃이 진 후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미 꽃밥이 터지고 암술머리에 수분이 된 후 후줄근한 수술을 보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은 이글거리는 잉걸불이 아닌 사그라지는 불씨이다.
벼는 아침 10시 즈음에 1시간 정도 잠깐 왕겨를 열고 암술과 수술을 살짝 내밀었다가 자기들끼리 짝꿍 한 후에 왕겨를 닫아버리는, 그래서 다른 꽃의 암술과 수술이 만나 수분을 하는 타화수정이 아닌 같은 꽃의 암술과 수술이 수분을 하는 자화수정식물이다.
그러므로 벼 꽃을 보려면 아침에 들녘에 나서야 한다. 비록 꽃같잖은 꽃이지만, 그 꽃에서 식량인 쌀알이 만들어진다.
초록의 벼는 초록으로 푸르지만 그대로 싱싱함을 자랑함에 머물지 않고 주황으로 변하면서 알곡을 영글는 알찬 곡식이다. 가을의 황금들녘은 봄여름의 초록이 꿈꾸던 것이다. 초록 논에서 황금빛 이삭을 들여다본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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